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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5 16:34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y Pic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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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Pablo Ruizy Picasso:1881.10.25~1973.4.8)
 
 
파블로 피카소.jpg

 

작가연보

1881년 10월25일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출생.
1889년 첫 작품 [투우사]를 그림.
1895년 바르셀로나의 라 론하 미술학교에 입학.
1897년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 마드리드의 미술전에서 '과학과 은총' 수상.
1900년 친구 카를로스 카사혜마스와 함께 파리로 감. 잡지 '호벤투트'에 첫 소묘집 발표.
1901년 마드리드에서 잡지 '아르테 호벤'의 펴집과 삽화 담당. 볼라르의 화랑에서 첫 개인전. 이때부터 'Picasso'라 싸인함.
1904년 파리의 라비냥가 아뜨리에 [라보아르]에서 제작.아폴리네르를 만남.
1905년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서 고졸에서 생활.
1907년 브락크, 드랭을 만남. 화상 칸와일러를 만남. 세잔의 회고전에 감명. 흑인 조각의 여향.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제작.
1910년 큐비즘의 전성기.
1912년 '블라우에 라이터 전'에 참가.
1914년 조각제작 시작. 브락크, 드랭과 아비뇽에 머뭄.
1915년 파리에 머뭄.
1918년 올가와 결혼. 라 보에티가 23번지 아파트에 옮김.
1919년 러시아 발레단과 런던에 감. 미로를 만남.
1920년 파리, 로마에서 개인전.
1923년 앙드레 브르통을 만남.
1924년 발레 [멜퀴르]의 무대장치.
1925년 제1회 '슐리얼리스 전'에 출품.
1926년 파리 로장베르 화랑에서 개인전.
1927년 뉴욕, 베르린, 파리에서 개인전.
1928년 시카고, 뉴욕, 파리에서 개인전.
1929년 조각가 곤잘레즈와 추상조각 시도.
1930년 [피카소 부인]이 피츠버그의 카네기 화랑에서 1등상 수상.
1931년 발자크의 [알려지지 않은 걸작], 오비디우스의 '메타모르포즈'를 위한 삽화 제작. 6월, 런던에서 '"피카소 30년 전"을 개최.
1932년 샤토 드 보와즈르에 아뜨리에를 세움.
1933년 슐리얼리스트 잡지 '미노토르마쉬'의 표지그림.
1934년 스페인에 머뭄. 투우 시리즈 제작.
1936년 프라도 미술관장에 임명. 도라 마르를 만남.
1937년 '프랑코의 꿈과 거짓'을 출판. [게르니카] 제작.
1938년 보스턴, 런던, 뉴욕에서 작품전.
1939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피카소 예술 40년전] 개최.
1940년 독일군 침공 이후 파리로 돌아옴.
1941년 '꼬리 밟힌 욕망'을 집필.
1942년 뷔퐁의 '박물지'를 위한 엣칭 삽화31점을 제작.
1943년 뉴욕에서 개인전.
1944년 살롱 도톤에 피카소 작품(79점)을 특별 전시.
1945년 석판화 제작.
1946년 프랑소아즈 질로를 만남. 발로리스에서 도기 제작.
1947년 라미에 부처와 함께 발로리스에서 도기 제작.
1948년 '죽은 자의 노래'에 석판화 6점을 실음. 파리서 도기 개인전. 런던에서 석판화전.
1949년 메리메의 '칼멘'을 위한 엣칭 42점을 제작. 레네의 영화 [케르니카]를 완성.
1950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출품. 바르샤바 제2회 평화옹호 국제회의를 위한 포스터 제작.
1951년 파리에서 조각전. 살롱 드 메에 [한국의 학살]을 전시.
1952년 발로리스의 교회당에 벽화 [전쟁과 평화]를 제작.
1953년 프랑소아즈 질로와 이별.
1954년 실베트의 초상화 시리즈 제작.
1956년 칸느의 라 칼리포르니 별장에 옮김.
1957년 클루소의 영화 [피카소, 천재의 비밀]이 완성. 런던에서 "피카소 판화 50년전" 개최.
1958년 쟈클린 로크와 동거.
1959년 파리의 유네스코회관에 벽화 [떨어지는 천사]를 제작. 리놀륨 판화 시작.
1960년 [라스 메니나스와 생활] 시리즈 발표.
1961년 마네의 [풀밭에서의 식사] 개작 시리즈.
1962년 쟈클린 로크와 결혼. 59년 이후의 보르나르그 시리즈를 발표.
1963년 다비드 [사비느의 약탈] 개작 시리즈.
1964년 [화가와 모델] 시리즈 제작. 바르셀로나의 건축가 회관에 벽화 제작.
1965년 캐나다, 동경에서 "파카소 전" 개최.
1966년 시카고의 시빅 센터를 위한 모뉴먼트 원형을 완성.
1967년 시카고의 시빅 센터에 모뉴먼트 건립.
1968년 [347점의 엣칭] 순회전.
1969년 칸느의 마두라 화랑에서 [도기전]개최.
1970년 바르셀로나의 미술관에 약9백점의 유화, 뎃상, 판화를 기증. 12월 18일 [피카소 미술관] 개관.
1971년 파리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파카소 90세 기념 대회고전] 개최.
1972년 동경에서 [근작전] 개최.
1973년 남부 프랑스의 무쟁에서 사망(92세)


  14세 때 바르셀로나로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무렵 당시 바르셀로나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와 북유럽의 미술운동에서 많은 자극을 받고 특히 A.르누아르, H.툴루즈로트레크, E.뭉크 등의 화법에 매료되어 이를 습득하는 데 힘썼다.

 1897년 마드리드의 왕립미술학교에 들어가 바르셀로나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고 1900년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 다음해 재차 방문하여 몽마르트르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제작활동을 하고 있던 젊은 보헤미안의 무리에 투신하였다. 당시의 그의 작품에는 위에 열거한 화가들 외에 P.고갱, V.고흐 등의 영향도 많이 반영되었으나, 점차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소위 ‘ 청색시대(靑色時代)’로 들어갔으며, 테마는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의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는 색조가 청색에서 도색(桃色)으로 바뀌는 동시에(도색시대) 포름으로는 과거의 에스파냐예술, 카탈루냐지방의 중세조각, E.그레코, L.F.J.고야 등이 지닌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어 갔다. 테마는 작품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광대》 《곡예사가족》 등에서처럼 곡예사들을 묘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어릿광대나 곡예사는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고 그 생활의 이면을 파헤친 애수였다.

 1905년 G.아폴리네르와 교유하고 다음해에는 H.마티스와 교유하였다. 그러나 작풍은 P.세잔의 형체관을 살려나가 점점 단순화되고, 1907년의 영원히 기념할 명작 《아비뇽의 아가씨들》 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形態分析)이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G.브라크와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그와 함께 입체파운동에 들어가 1909년에는 분석적 입체파, 12년부터는 종합적 입체파시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었고, 종합적 입체파수법을 23년경까지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수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였는데, 활동범위도 J.콕토와 알게 되면서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등 점점 확대되어 갔다. 즉 15년 《볼라르상(像)》과 같은 사실적인 초상을 그리고, 1920년부터는 《세 악사》 등 신고전주의를, 다시 1925년에는 제1회 쉬르레알리슴(초현실주의)전(展)에 참가하였다. 또 1934년에는 에스파냐를 여행하여 투우도 등을 그렸으며 1936년의 에스파냐내란 때는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다음해 프랑코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虛言)》 및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그려낸 세기의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통곡하는 여인》도 이 무렵의 작품이며 이때부터 피카소 특유의 표현주의로 불리는 괴기한 표현법이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해는 에스파냐에서 지냈으나 다음해 독일군의 파리침입 직후 파리로 돌아와 레지스탕스 지하운동 투사들과 교유하고, 1944년 종전 후는 프랑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주로 남프랑스의 해안에서 생활하면서 그리스신화 등에서 모티프를 취하여 밝고 목가적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도기(陶器)제작과 조각에도 정열을 쏟고 석판화의 제작도 많아 이 영역에서도 새로운 수법을 창조하였다. 그 후 6·25전쟁을 테마로 한 《한국의 학살》(1951) 《전쟁과 평화》(1952) 등의 대작을 제작하여, 현대미술의 리더로서 거장다운 활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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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카소-코리아에서의학살 ] 인류역사에 있어서 '전쟁'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의 역사만 보더라도 한반도에서 치러졌던 전쟁의 수효도 적지 않다.6.25라는 전쟁을 치르고 아직도 '휴전'이라는 명분 하에 동족끼리 적이 되어 있는 민족의 현실이 아닌가.그런데 아쉽게도 우리에겐 이 아픔을 승화시킨 전쟁화나 역사화를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화가의 유명세덕분에 더 알려진 피카소의 [코리아의 학살]은 우리 미술인 들의 우리역사에 대한 관심을 되집게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피카소의 작품과 연관되어있는 몇몇 그림에 관한 점만 언급해 볼까한다. 차가운 메탈느낌의 기관총을 겨누고있는 SF 영화에서나 봄직한 기계인간(?)군들 앞에 공포 속에 떨고있는 여인네와 아이들 사실 이 그림의 구도는 1867년 마네가 그린 [맥시밀리언 황제의 처형]과 판박이처럼 닮았다.

 [ 마네 - 맥시밀리언 황제의 처형] 그러나 재미있게도 마네의 이 그림은 그보다 앞서 고야가 그린 [1808년 5월 3일](1814)이 원조 격이라고나 할까.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이럴 때 어울릴까!! 아니면 학살이라는 주제를 가장 실감나게 전해줄수 있는 구도의 정형화라고나 할까!

 [ 고야 - [1808년 5월 3일]] 어떻든 간에 우리의 손에 의해 만들어 지지 않음이 아쉽긴 하지만 전쟁 혹은 학살을 고발하려 한 피카소의 의도만큼은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참고로 6.25 소재의 작품으로는 김원의[피난민]이라든가 박상옥의 [6.25 동난], 이종무의 [폐허의 서울],권영우의 [폭격후], 김수억의 [폐허의 서울]과 [6.25 동란] 김환기의 [피난열차] 박고석의 [부산범일동 풍경]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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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는 천재이다. 피카소는 미치광이다. 피카소는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예술가이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이다. 피카소의 그림은 난센스다. 어린애도 그보다는 잘 그릴 수 있다. 피카소라는 이름이 일으키는 연상작용은 상호모순되는 신화로 가득차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또 피카소라는 이름은 무언가 변형된 것을 보면 “피카소적이군” 하는 말을 흔히 듣게 될 정도로 하나의 형용사처럼 쓰이고 있다.

 907년 늦여름 피카소는 이미 몇달 전부터 그리던 거대한 작품 하나를 완성했다. 넓이가 6㎡나 되는 이 작품은 수백장의 데생과 습작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당시 이런 세부적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는 누구에게도 아틀리에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문이 파리의 친구들에게 활짝 열리던 날, 피카소의 그림에 익숙해 있던 그들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식견있는 화상 레오 스타인은 “4차원의 세계를 그리려 했던 거요?”라며 비웃었고, 야수파의 거장 마티스는 “사기”라고 화를 냈다. 피카소 숭배자인 아폴리네르도“굉장한 혁명이군”이라며 마지못해 한마디했다.

 훗날 예술사가들이 20세기 현대예술, 즉 `큐비즘' 예술의 출발점으로 간 주하고 있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해 부족 때문에 17년 뒤 한 미술애호가에게 팔릴 때까지 아틀리에의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잘라놓은 치즈조각 같은 코, 뾰족 튀어나온 큼직한 무릎, 삐죽삐죽 모가 난 나체의 창녀들의 모습은 보는 이의 눈을 빙초산처럼 자극했던 것이다.

 장님과 임신한 어린 소녀, 여윈 곡예사와 누더기 걸친 늙은이 등 정처 없는 떠돌이 인생을 주로 그리던 청년 피카소에게 일부 애호가와 친구들을 뺀 대중은 반감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이제 피카소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원근법을 내동댕이 치고, 인간 모습의 이상화라는 원칙을 깡그리 무시하고 나섬으로써 그 애호가들을 당황하게 만든 셈이었다. 그의 실험은 19세기와 20세기 미술 사이에 그어진 단호한 단절의 획이었다.

 피카소는 “나는 결코 어린 아이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열두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말하기보다 연필잡는 법을 먼저 알았고 일찌감치 그림천재의 재질을 보였다. 나이 제한에도 불구하고 바르셀로나 미술학교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했으며 스페인의 미술전통을 소화해 열다섯 살 때에는 풍속화와 초상화를 능란하게 그려냈다.  마드리드 전람회 입상을 계기로 마드리드에 유학하게 된 피카소는 화실을 가진 `진짜 화가'가 됐으며 열여덟살 때는 스페인 대표로 <마지막 순간>이란 작품을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회고전에 출품했다.

 고야 이후의 스페인 미술계는 과거에 기대어 19세기에 살고 있었던 데 반해 에펠탑과 전기분수에 도취된 파리의 미술계는 들라크루아와 마네의 영향으로 20세기의 혁명적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유럽의 시골인 스페인에서 선배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젊은이에게 파리는 `꿈과 빛의 도시'일 수밖에 없었다.

 1900년 피카소 나이 열아홉살, 파리에서 첫 이국생활이 시작되었다. 불어라고는 한마디도 못하고 생활고는 극심했지만 그에게 파리는 그 자체가 거대한 미술학교였다.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나선 그는 인상파의 그림 앞에 넋을 잃었고 드가, 로트렉, 고흐, 고갱 등의 그림에 대한 정열적인 연구를 거듭했다.

 3차례의 귀향 이후 몽마르트르에 완전히 정착한 것이 1904년. 30개의 아틀리에에 수도꼭지가 단하나뿐인 `바토 라부아르'(세탁선)라고 불리는 건물에 화실을 마련했다. 그 이름은 보기흉한 몰골과 쓰러질 듯 흔들리는 모양이 세탁부들이 빨래터로 쓰는 강변의 낡은 배와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동반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동반자들은 그의 그림에 짙은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기도 했다. 절친한 친구 카사게마스의 자살이 화면을 청색 단색조의 차가운 투명성에 침잠케 했고(1901~4년, 청색시대라 불린다), 첫 여자 페르낭드 올리비에가 그 우울을 씻기며 분홍시대(1905년)를 열어주기도 했다. 시인 막스 자콥과 아폴리네르, 미국인 화상 스타인 남매, 독일인 화상 칸 바일러, 화가 마티스들이 그의 곁에 있었고, 이들은 그의 토론 상대이자 지지자였다. 이들 가운데 <아비뇽의 아가씨들>에서 피카소의 천재성을 대뜸 발견해낸 건 뒷날 유명한 화상이 된 칸 바일러뿐이었지만.

 미술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일을 사진에게 맡기고 독자적 존재이유 확인에 나선 것은 피카소 이전, 19세기의 일이었다. 피카소는 자신들의 인상, 시각과 시선을 그림에 개입시키던 선배화가들과 다른 방식으로 작업을 재개했다. 평면의 화면에 입체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나선 것이다. 그는 생각이 비슷하던 조르주 브라크를 만남으로써 구체적인 결실을 하나씩 맺어간다. 1907년 세잔의 대규모 회고전을 계기로 두 사람은 “자연은 원통 원추 원구로 처리될 수 있다”는 세잔의 희망을 현실화시켜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축소된 기하학적 그림을 경쟁적으로 그리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은 정중하고도 비평적 관점에서 서로의 작품을 존중하는 가운데 진실한 우정을 맺고 입체파, 즉 큐비즘운동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가 된다. 피카소는 이베리아와 아프리카 원시시대 예술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형상화하는 방법을 배웠다.

 피카소 혁명은 양식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일상의 진부한 재료를 변용한 파피에 콜레, 콜라주, 아상블라주의 작업을 통해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나아가 미술의 고귀함은 이제 작품의 주제만의 문제도, 대상이나 방법에 기인하는 것도 아님을 드러냈다. 미술가의 창조적 사고, 변형능력, 그리고 미술이 아닌 것에서 미술을 창조해내는 능력이 미술의 문제가 되었다. 예술이란 자연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젊은 초현실주의자들과 20년대의 피카소 사이에는 사상적 근친성이 없지 않았고, 피카소는 이들과 관련을 맺기도 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이 보기에 피카소는 지나치게 외부세계와 대상에 집착하며 꿈의 세계에서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스페인 내란과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은 그에게 <게르니카>(1937년), <납골당>(1945년), <한국에서의 학살>(1951년), <전쟁과 평화>(1954년) 등 대량학살과 폭력을 증오하는 대작들을 남겼다. 마드리드 시절 거리의 부랑아들과 빈민을 화폭에 살려내던 무정부주의자 피카소는 파리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직후 프랑스 공산당에 정식 가입한다. 그러나 피카소의 현대성과 프랑스 공산당 역시 견지하던 예술관, 사회주의리얼리즘이 충돌한다. 첫 충돌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프랑스 공산당은 이 그림의 형식을 문제삼았다.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라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피카소의 분방한 예술은 끝내 공산주의와 결별하게 된다.

 말년의 피카소는 “미술이 자신보다 훨씬 강한”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 자신의 현대미술에 대한 업적을 파괴하려는 일련의 작업을 시도하지만 우상파괴의 표면적 양상과는 달리 <커다란 형상들> <투우사> 등의 걸작들을 내놓는다. 무신론자인 그는 자신이 죽은 뒤에 미술작품 이외엔 아무것도 남길 수 없다는 허무감 때문에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20세기의 한참 후반인 1973년, 마지막 거처인 액상 프로방스 근처 무쟁의 저택에서 숨을 거둔 그는 자신이 뿌린 비미술이라는 현대미술을 지켜보는 `행운'을 간직한 채 땅에 묻혔다.

 그의 생애는 길고도 풍요했다. 아흔한 살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날 때 그가 남긴 작품은 그림 판화 조각 데생 콜라주 도자기 등 모두 4만4천여 점. 이들 방대한 양의 그의 작품은 순수예술의 문제와 그보다 폭넓은 문제에 대한 그의 감수성을 나타내줄 뿐만 아니라 피카소라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그가 죽은 뒤 발견된 서로 크기가 다른 1백75권의 충실한 화첩이 1894~1967년의 그의 내면의 일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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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방가르드 / Avant-Garde(프) Bert Stern, American (1929 - ) / Title: Avant Garde Marilyn - 5 / Size: 11 in. x 22 in. (27.94 cm x 55.88 cm) 아방가르드의 기원 예 술이 시대를 앞서간다는 생각은 19세기 이후 예술가들의 세계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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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1912.1.28~1956.8.11)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1912.1.28~1956.8.11) U.S.A 2010, Mar.11 / Convergence, 1952 Oil on canvas. 237.5 x 393.7 cm 미국의 추상화가. 1912년 와이오밍주(州) 코디 출생. 로스앤젤레스의 미술학교를 다니다가 퇴학 처분을 받고, 1930년에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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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탁본 (拓本)

    탁본(拓本) 무장사 아미타불 조성기비 부기 탁본(鍪藏寺阿彌陀佛造成記碑 附記 拓本) 이미지 출처 : http://www.chusa.or.kr/work/work_epigraph_detail.html?page=1&seq=54&condition=&words= 석비(石碑)나 기물(器物) 등의 각명(刻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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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탱화(幀畵)

    탱화(幀畵) 금니 천수관음탱화 불교의 신앙내용을 그린 그림. 내용은 신앙대상이 되는 여러 존상(尊像)만을 그리는 존상화와 경전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변상도(變相圖)의 성격을 지닌 것이 있다. 탱화는 기능에 따라 본존의 후불탱화(後佛幀畵)와 신중탱화(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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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테라코타(Terra-cotta)

    테라코타(Terra-cotta) 양질의 점토로 구워낸 토기류. 원어는 구운 흙[粘土]을 뜻하나, 일반적으로는 미술적 조각 작품의 소재를 말한다. 테라코타의 유래는 매우 오래 되어, 석기시대에 이어서 또는 그것과 병행하여 발명된 것으로 생각되며, 고대 메소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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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템페라 (temperare)

    템페라(temperare) 봄(포플러 나무에 템페라/203×314cm/1482년경) - 보티첼리(Botticelli, Sandro/1444~1510/이탈리아) 라틴어의 ‘temperare(안료와 매체의 혼합)’를 어원으로 하는 그림물감의 일종. 난황·난백·아교질&mid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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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y Picasso)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y Picasso:1881.10.25~1973.4.8) 작가연보 1881년 10월25일 스페인의 말라가에서 출생. 1889년 첫 작품 [투우사]를 그림. 1895년 바르셀로나의 라 론하 미술학교에 입학. 1897년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 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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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팝 아트(Pop Art)

    팝 아트(Pop Art) Andy Warhol Marilyn Monroe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인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미술로 수용한 사조인 팝아트는 예술성 자체의 의미라기 보다는 광고, 산업디자인, 사진술, 영화 등과 같은 대중 예술매개체의 유행성에 대한 새로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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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패러디 (Parody)

    패러디(Parody) 출처 : http://9bytz.com/van-gogh-parodies/ 이미 있는 예술 작품에 손질을 가해 그 가치를 떨어뜨리며, 또한 그것을 예술 작품이라 인정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것. 현재는 작가의 권위를 부정하기 위해서도 채용되는 수법이다. $(document).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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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패턴 회화 / 패턴 페이팅(Pattern Painting)

    패턴 회화 / 패턴 페이팅(Pattern Painting) 출처 : http://fineartamerica.com/featured/83-pattern-troy-thomas.html 하나의 익숙한 형태를 화면 전체에 반복하여 그리는 회화. 1970년대 이휘에 나타나 신기함의 중요성을 보이지 않는 점으로 포스트 모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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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편파구도 (偏頗構圖)

    편파구도(偏頗構圖) 그림을 종(縱)으로 2분할 때 한쪽 반이 다른 쪽 반보다 더 강조되고 더 큰 무게가 주어진,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구도를 말한다. 조선 초기 안견파(眼見派) 작품에서 흔히 발견된다. $(document).ready(function() { $(document).bind("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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