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전반기 미술
프랑스 혁명과 산업 혁명의 영향으로 자유와 개인의 능력을 중요시하고 각자의 개성이 존중되었던 19세기에는 교회나 왕권을 위한 미술에서 벗어나 미술의 순수성을 모색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갖가지 유파가 발행하였다.
19세기 전반에 미술 세계를 이끌었던 갖가지 유파는 고전파의 신고전주의, 낭만파의 낭만주의, 자연파의 자연주의, 사실파의 사실주의로 집약된다.
신고전주의
신고전주의는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전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운동이다.
역사적으로는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라크레눔의 발굴이나 동방 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 등이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전후 이러한 고대에 대한 동경이 당시 사회 전반을 풍미하고 있었다.
고대의 유물과 예술품들을 소개하는 학자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카일루스의 『고대 이집트, 에트루리아, 그리스, 로마, 갈리아 지방의 유적 목록집』이나 피라네시의 『로마의 위대성』『로마의 유적』등은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운동의 미학적 근거를 이룬 사람은 독일의 예술사학자 빈켈만이며, 대표적 예술가로는 화가 멩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이 운동의 본부격이라고 할만한 로마에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만들어 이 새로운 이념을 전파하는 국제적인 사교장으로 사용하였다.
멩스는 자신의 명성은 라파엘로, 코렛지오, 티티안등 대가들의 수법을 사용하고 조용한 단순성과 고귀한 위풍이 적절히 표현된 고대의 모범들의 제 요소에 기초해 이른바 그랜드 매너를 추구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실제 조각에서는 멩스 자신의 작품「파르나수스」라든지 그의 절친한 친구들 - 가뱅 해밀튼, 요셉-마리 비엥등 - 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무미건조하고 인공적인 양식이 등장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빈켈만의 사상과 이론에 영향을 받은바가 컸다.
멩스와 마찬가지로 빈켈만도 현대 예술은 모름지기 고대의 조각이 이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와 자연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고대 예술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품성, 즉 명성을 구하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덕적 품성을 특히 강조했다.
프랑스에서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삶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들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등이 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자크 루이 다비드가 있으며 그의 작품 「호라티의 맹세」「독배를 드는 소크라테스」 등은 신고전주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신고전주의는 건축에서도 충분히 발현되었는데 영국의 아담 형제, 독일의 랑한스, 프랑스의 장-프랑스와 샬그랭, 알렉산드르 테오도르 브로냐르, 클로드 니콜라스 르두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각가로는 이탈리아의 카노바와 토발트센등이 활발하게 활동했다.
신고전주의 운동은 미국으로도 전해져 조각가 히램 파워스, 호레이쇼 그리너프, 화가 존 반델린등이 등장했다. 신고전주의는 고대의 모범들을 신중하고도 의식적으로 모방한다는 점에서 그전에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고전 부흥 운동과는 사뭇 달랐다.
낭만주의
낭만주의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전 유럽에 탄생한 예술적 경향이다.
개성을 구가하고 자아의 해방을 주장하며 상상과 무한적인 것을 동경하는 주관적·감정적인 태도가 두드러진 특색이다.
미술상으로는 고전주의, 바로크에 대해서도 이 경향은 언급되지만, 일정하고도 명확한 양식을 낳은 것은 아니다. 조각 분야에서는 프랑스와 뤼드, 건축에서는 이른바 신고딕 양식과 상통하는 바가 있는데, 회화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 차가운 형식 존주에 대한 반동이라는 형태로, 프랑스의 그로에서 시작되어 제리코를 거쳐 들라크루아에 이르는 동안 분방한 색채, 유동적인 필치, 동감에 찬 구성을 갖춘 영웅적 작품을 남기고 있다.
특히 들라크루아의 「단테의 배」 를 비롯한 그의 작품은 들라크루아의 동방 취향 또는 이국 취미에 의한 후기 작업으로 낭만주의의 한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낭만주의의 이와 같은 특색은 회화사상 독일 중세 혹은 초기 르네상스의 종교적 정열과 결합된 작품, 나잘레파, 룬게, 프리드리히의 범신론적 풍경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20세기 미술에 있어서 낭만주의는 보다 복잡다단해서 19세기의 그것처럼 크게 분류될 수는 없다. 비합리적이고 공상적인 예술은 어떤 면에서 낭만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일지 모르나 결코 그렇지는 않다. 공상만을 즐기는 낭만적인 경향, 혹은 감상적이라는 의미에서 현대 미술의 낭만주의자를 든다면 장 뤼르사, 레오폴드 쉬르바지등이 있으나 이들의 공상은 초현실주의와 같이 비유, 암시, 변모가 아니라 단지 신선하고 아름다운 화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정도이다.
뤼르사의 공예 방면의 탁월한 수완은 그의 풍부한 낭만성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샤갈의 예술도 사실에 의하지 않은 환상이란 의미에서 낭만주의의 범주에 들 수 있다. 그러나 샤갈 자신은 자신의 작품을 사실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또 크리스티 앙 베르망 형제, 파벨 첼리체프의 예술에는 낭만적인 감상성이 엿보여 사실주의 화가라고 부르기에는 주저되는 면이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외부 세계를 그린 작가로, 그것은 이들의 신휴머니즘적 모럴의 위치를 보여준 것이다.
자연주의
서정적이고 청신한 전원 풍경을 주로 그렸던 자연주의는 현실에 대한 목적론적 설명을 거부하고, 현실을 선입견 없이 실험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을 예술에 적용한다.
이것은 이상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으며, 낭만주의에 의해 조장된 개인적 감정의 득세에 의해 촉발되었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만프레디, 리베라, 발렌틴, 혼도스트등과 카라밧지오의 제자 벨로리였다. 충실하게 모사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자연주의라는 말을 썼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농민화가였던 밀레의 「만종」「이삭줍기」와 고요한 서정이 넘치는 그림을 그렸던 코로의 「진주를 단 여인」「모르트퐁텐의 추억」이 유명하다. 영국에서는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물과 안개의 화가라 불리는 터너와 밝고 풍부한 색감으로 전원과 빛, 대기의 풍요함을 표현했던 컨스타블이 있다.
사실주의
사실주의는 합리적 질서 위에서 대상을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형식화나 데포르마숑을 행하지 않는 예술사조이다.
대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미술사적으로 볼 때, 사실주의는 그 의미가 다양하여 명확하고 일관된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19세기의 사실주의가 흔히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와 대립된 개념이었던 데 비해, 20세기의 사실주의는 추상적이란 말과 대립된 개념으로 쓰인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주의는 자연의 존중과 관찰이 그 주요한 과제였으므로 이런 점에서는 자연주의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주관을 피하고 대상의 엄격한 객관화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작가의 개성이 반영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리얼리스틱한 표현이라 해서 자연이라는 패턴의 단순한 반복만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주의는 각 시대, 각 작가에 따라서 독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를테면 구석기 시대 동굴의 벽화, 헬레니즘의 조각, 반 아이크 형제, 뒤러, 벨라스케스, 고야등의 작품에서 사실주의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다.
역사적 유파로서의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유럽에 확대되었는데 그 발생에는 부르주아의 대두, 과학의 발전, 기독교의 권위 추락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미에의 시니컬한 사실주의는 쿠르베의 이상화 및 공상화를 배제함으로써 사실주의의 정점을 이루었다.
독일에서는 라이플, 벨기에에서는 뫼니에등의 작품에서 리얼리스틱한 생활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실주의는 변질되어 이념과 기법이라는 양극으로 분열된다.
19세기 후반에 발명된 사진이란 새로운 기술의 급속한 보급으로 사실주의가 추구해 온 대상의 객관적이고 엄밀한 재현은 더 이상 예술가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했다. 그리하여 계속되는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서 화가는 늘 사회와 인간에게 눈을 돌리고 진부한 외관만의 묘사를 초월하여 새로운 현실상을 그림으로써 이념과 기법으로 분극된 사실주의는 서로 교차하면서 유파를 초월한 미술의 저류를 형성해 왔다.
한편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서의 사실주의는 독일, 멕시코, 미국, 소련등지에서 각각 독자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다.
독일의 사실주의는 오토 딕스, 게오르게 그로츠, 막스 베크만, 케테 콜비츠 등으로 대표된다. 멕시코에서는 1912년 혁명에 뒤이어 일어난 내전에 참가했던 시케이로스, 리베라, 오로츠코등의 화가들이 식민지 시대의 아카데미즘에 반기를 들고 멕시코적 사실주의인 이른바 '멕시코 르네상스'를 확립했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 뉴딜 정책하에 실업 구제를 위해 민중 생활 묘사나 벽화 제작에 미술가들이 동원되어 미국 풍경화파란 일련의 사실주의 경향이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부터 뉴 리얼리즘이란 표현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주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팝 아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실주의에 대한 새로운 접근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사실주의는 반추상적이란 개념은 물론, 전통적인 것, 기존의 예술 사조에 대한 가치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말로 쓰인다.
인상주의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회화 운동이 일어난다.
인상주의는 단일한 이념이나 명백한 원리를 갖는 유파라기 보다는 거의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었다.
최초의 중심 인물은 모네, 르노아르, 시슬리, 바질 등으로 이들은 마르크 글레이르의 제자들이었으나 1863년 마네의 전시회 이후 아카데믹한 교습에 불만을 갖고, 피사로, 세잔느, 모리조, 기요맹과 친교를 맺고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다.
이후 드가와 마네, 테오도르 뒤레 및 조르주 리비에르도 합세하고, 화상 뒤랑 뤼엘의 후원을 받게 된다.
1873년 살롱이 피사로, 모네, 르노아르, 세잔느, 그리고 시슬리의 그림을 거부하자 이것을 계기로 이듬해 1874년에 자신들의 앵데팡당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출품작중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인용하여 루이 르로이가 이들 모두를 '인상주의자'라고 명명한 것이 받아들여져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아카데미의 전통 교육과 낭만주의의 기본 이념에 반대하는 성향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예술가의 정서상태보다도 오히려 자연 혹은 삶의 편린들을 가능한한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정신에 의해 기록함을 예술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는 사실주의의 태도에 동조했다.
그들의 주제는 매우 다양했는데, 마네는 18세기 전통적 주제들을 사실적으로 변형시켰고, 르노아르는 귀여운 여인이나 아이들, 아름다운 풍경들을, 드가는 경마, 무희, 세탁부, 재봉사들을 주로 그렸고, 모네, 시슬리, 피사로는 주로 풍경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형태 구성을 피하고 마치 카메라가 우연히 한 장면을 찍은 것처럼 즉각적인 시각적 인상의 효과를 전달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우연성의 인상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으로서 드가는 현장에서의 스케치를 자신의 작업실에 와서야 비로소 그림으로 구성했다. 르노아르는 검은 음영과 윤곽선을 배제하고 색채 분할 기법, 점묘법을 도입하여 풍경화를 재창조하는 행위를 했다.
따라서 인상주의 회화는 빛과 대기의 회화, 지시색과 반사색의 유희로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기법은 바르비종파의 디아스 데 라 페냐의 영향 아래 1860년대 말 르노아르에 의해 도입되어 모네, 시슬리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다갈색 대신 흰색이 초벌칠된 캔버스 위에 혼합되지 않은 그림 물감을 사용하는 필법, 검정색의 배제등의 기법을 사용하였다.
인상주의에 의해 제가된 과학적 리얼리즘은 그 이후 미술운동 흐름에서 퇴조했지만, 근대 예술 이론을 전개하는 출발점으로서 여전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신인상주의
신인상주의는 쇠라, 시냑등을 중심으로 행해진 점묘주의등의 이론과 수법 및 그 운동을 말한다.
인상주의가 사용한 기법을 과학적으로 더욱 발전시키면서도 동시에 인상주의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 고전주의적 정신의 부활을 꾀한다는 기치 하에 쇠라가 1884년 5월의 앵데팡당 전에 출품한 「목욕하는 사람들」을 보고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이 신인상주의라 이름붙였다.
쇠라는 거기서 시냑을 만나 함께 '앵데팡당 미술가 협회'라는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다.
점묘주의 혹은 분할주의는 신인상주의가 사용하는 독창적인 테크닉의 기반을 이루는 것으로써, 캔버스에 색칠을 해 나갈 때 순색만을 사용하되 이를 일체 뒤섞지 않으면서 작은 점으로 찍어나가는 방법을 말한다.
이 경우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위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이 방법은 와토, 들라크루아, 터너 등이 이미 사용하였으며 인상주의자 중 르노아르가 최초로 사용했다.
쇠라등의 신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러한 기법을 좀 더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자신의 기법에 '점묘주의' 대신 '분할주의'라는 용어를 더 어울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1887년부터 1891년 사이 쇠라는 과학적 이론들을 과학적이고 정서적인 선과 색조로 환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이론과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한다.
색채 분할등 인상주의의 기법을 더욱 체계화시키는 동시에, 신인상주의자들은 인상주의자들의 경험주의적 사실주의에 정면으로 대비되는 정신, 즉 그림이란 신중하게 고려되고 계획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계산된 효과가 예견, 지향될 수 있다는 사고를 도입시켰다. 세잔느와 더불어 쇠라가 현대 회화의 혁신적 인물로 취급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후기 인상주의
영국의 미술 평론가 로저 프라이가 1910∼11년 겨울에 런던의 그래프론 화랑에서 기획·개최한 전시회인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이란 표제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어떤 특정한 예술 운동, 단일한 경향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모네, 피사로, 시슬리등의 인상주의와 단순한 점묘주의로서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된, 보다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하려 했던 경향과 표현 내용을 중요시했던 경향을 말한다.
여기에는 만년의 르노아르, 루소등의 화가도 포함되나,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세잔느, 반 고호, 고갱 세 명만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세잔느는 인상주의의 작품이 물체의 형태가 불꽃 속에 용해되어 공간 표현이 애매해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물체의 실제감과 고전적 작품의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해서 입체파에의 길을 열었다.
반 고호는 정열적인 감정의 표현을 강하게 하여 표현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고갱도 상징주의적 색채를 짙게 띤 인간의 생과 사, 영적인 것등의 표현을 통하여 인상주의를 탈피, 그 순색의 넓은 색면에 의한 기법을 개발하여 야수파에의 길을 열었다.
인상주의에서 일단 발전하여 그 개성적인 표현 방법을 확립하고, 다음의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이들 화가들을 일괄한다는 점에서 이 후기 인상주의란 말의 의의가 있다.
기타 19세기 미술
회화 부분에서 그 외의 화가로 대표적인 사람은 술집 정경등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심리적인 사실을 추구했던 로트렉의 「무랑루즈」,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풍경을 주로 그리면서 소박한 꿈과 환상의 세계를 표현했던 루소의 「이국적 풍경」, 현실 도피적이고 예술 지상주의적 태도로 고갱의 영향을 받았던 모로, 르동이 있다.
조소 부문에서는 근대 조소의 개척자이자 조소를 건축으로부터 독립시킨 로댕이 유명하다.
로댕은 기계적, 외형적 사실을 벗어나 강조와 생략된 표현을 통해 인간 내면의 정신성과 생명을 표현하고자 했다.
대표작으로는 「발작상」「칼레의 시민」「지옥의 문」「생각하는 사람」「아담」등이 있다.
또 건축적 덩어리의 양감을 추구하여 기념비적인 조소를 창출했던 부르델은 웅장하고 남성적인 표현으로 「활 쏘는 헤라클레스」를 완성시켰다.
야수파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신적인 회화 운동으로 수년간 유사한 테크닉에 관심을 보였던 화가들에 의해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미술운동이다.
이 운동은 순수 색채의 고양에 주력했다.
이 새로운 화법은 1899년, 그룹에서 주도적 인물이었던 마티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야수파라는 명칭은 당시의 비평가 루이 복셀이 1905년 가을 마르케의 15세기풍의 청동조각을 가리켜 마치 "야수의 우리 속에 갇혀있는 도나텔로 같다"라고 평한데서 유래되었다.
이 운동의 동인은 귀스타프 모로의 문하생이었던 마티스, 마르케, 루오, 앙리 샤를르 망갱, 샤를르 카무엥 그리고 장 퓌이등과 '샤토'로부터 블라맹크와 앙드레 드랭, 그리고 프리츠, 브라크, 뒤피의 그룹이 융합된 것이었으며 네덜란드 화가 반동겐도 참여했다.
그들은 고호, 고갱, 신인상주의, 세잔느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 작품들의 특징은 강렬한 순수 색채에 있었으며 그 색채는 때로는 세잔느처럼 공간 구성에도 사용했지만 대부분 감정 및 장식적 효과를 위해 임의적으로 사용했다.
이 운동은 1905년 가을의 살롱 도톤느 및 1906년의 살롱 데 앵데팡당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야수파란 대부분의 동인들에게는 서로 다른 양식의 발전 단계에서 거쳐갔던 일시적 단계에 불과했고 1908년경부터 이들은 각자의 방향을 독자적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입체파
1900년부터 1914년까지 파리에서 일어났던 미술 혁신운동을 말한다.
1908년 마티스가 브라크의「에스타프 풍경」이란 연작을 평하면서 '조그만 입체 덩어리'라고 말한데서 유래되었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급격하게 발전한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세잔느풍의 입체주의, 분석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잇다.
입체파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 회화의 전통인 원근법과 명암법,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를 쓴 순간적인 현실 묘사를 지양하고, 야수파의 주정적(主情的)인 표현을 폐기한 대신 시점(視點)을 복수화하여 색채도 녹색과 황토색만으로 한정시켰으며, 자연의 여러 가지 형태를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상으로 환원, 사물의 존재성을 이차원의 타블로로 구축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 시도는 중기에 이르러 대상이 극도로 분할되어 나타난다.
그 후 트롱프뢰이유나 파피에 콜레의 수법을 채용하고, 이것을 과도기로 입체파 운동은 후기로 들어간다.
후기에는 풍부한 색채가 부활되어 기하학적인 색면과 대상의 환기력(喚起力)있는 요소와 결합·융합된다.
몽마르트르의 세탁선에 거주했던 피카소, 브라크등이 이 운동의 중심이었고 그 밖에 몽파르나스에서 화면에 밝은 색채와 다이나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F. 레제와 R. 들로네가 있고, 화면의 구성원리를 추구하여 추상예술의 길을 열었던 쿠프카와, 비용, 뒤샹등이 있다.
입체파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미술, 디자인, 건축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바우 하우스
바우 하우스는 1919년 건축가 그로피우스가 바이마르에 창립한 종합 조형학교 및 연구소이다.
건축을 주축으로 하여 기능적이고 합목적적인 새로운 미를 추구하는 일종의 예술과 기술의 종합을 꾀하는데 그 이념과 목적이 있었다.
바우하우스는 근대 기술의 대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고 이론적 교육과 실제적 교육을 행하여, 예술과 기계 기술, 인간과 기술, 예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예술과 생활 형식의 통일을 꾀하고자 했다.
종래 예술의 개인주의적, 살롱적 경향을 부정했던 바우 하우스는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 방식을 적극적으로 고취하였다.
따라서 그 기반이 되는 현대 사회의 근본적 성격을 분석하고 인식하여, 그것을 형태의 창조력의 해방, 자연의 재질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익히는 예비 교육과, 또 전문 코스에서의 형태 교육과 공방실습 등에서 구체화되었고, 그 교육의 방법론은 현대 디자인 교육의 기초가 되고 있다.
그로피우스가 제기한 '산업과 예술의 결합'은 하네스 마이어의 시대가 되면 한층 더 기능주의적 방향으로 전개되어 디자인의 사회성이 강조된다.
그는 형식주의에 빠져버린 바우하우스의 조형 감각을 경고하면서, 바우하우스는 예술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며, 따라서 디자이너의 창조적 활동은 사회에 의해 설정되어 민중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동 사회에 대해 객관 적 지식을 갖고 그 생성에 걸려 있는 문제를 취급할 때 디자이너는 비로소 자신의 작업의 의미를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디자인의 이런 사상은 보다 복잡한 모습을 지니면서 각국의 근대 조형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시카고에서 다시 뉴 바우하우스가 설립되었다가, 훗날 시카고 디자인 연구소가 되었다.
또 막스 빌은 울름에 뉴 저먼 바우 하우스로 알려진 조형대학을 연 일도 있다.
독일 표현주의
표현주의는 야수파, 초기의 입체파, 인상주의, 그리고 의식적으로 자연의 모방을 거부한 다른 여러 화가들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독일 비평가들이 1911년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다.
1911년 마르크와 러시아 출신 칸딘스키등은 청기사 그룹을 조직해 같은 해 뮌헨에서 중요한 전시를 개최했다.
마르크는 동물을 통해 세계를 다소 감상적으로 표현했고 곧 순수 추상으로 전환했다. 1911년 칸딘스키는 지각심리학 연구에 기초해 『예술의 정신적인 것에 대해서』를 썼다. 그는 대상에서 분리된 감정의 회화적 등가성을 밝히고자 했다. 그는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절대 순수를 표현하고자 함으로써 절대주의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표현주의는 독일을 풍미하게 되었다. 청기사 그룹의 미술가들은 더욱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작품을 제작했고 후배 세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칸딘스키나 클레같은 화가들이 바우하우스에서 그들을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신즉물주의로 알려진 독일의 새로운 리얼리즘을 전개한 그로츠와 딕스는 초기 표현주의에서 고안된, 왜곡과 과정이 심한 작품을 그렸다.
미래파
미래파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전위예술 운동을 일컫는다.
이 운동은 시인 필립포 마리네티가 효시인데, 마리네티는 기존의 낡은 예술을 모두 부정하고 기계 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다이내믹한 미를 창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자극되어 이듬해 2월 카를로 카라, 옴베르토 보치오니, 지노 세베리니, 루이지 루솔로, 쟈코모 발라의 5인의 화가가 연명으로 미래주의 화가 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12년에 역시 다섯 사람이 서명한 '미래주의 조각 기술 선언'이 발표되었고, 베르네임 주운 화랑에서 미래파 전람회가 열렸다.
미래주의의 커다란 공적은 기계가 지닌 차가운 역동적인 아름다움을 조형 예술의 주제로까지 높였다는 것과 스피드감이나 운동을 표현하기 위해 회화에 시간의 요소들을 도입하려고 시도한데 있다.
이 유파가 뛰어난 조형작품을 낳았다고 할 수 없지만, 현대에 있어서 예술의 소재에 대해 새로운 문제제기를 한 의의는 크다.
다다이즘
다다이즘은 1915~22년경 스위스, 독일, 프랑스등의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반문명, 반합리적인 예술운동을 일컫는다.
제1차 세계대전을 낳게 했던 전통적인 문명을 부정하고 기성의 모든 사회적·도덕적 속박에서 정신을 해방, 개인의 진정한 근원적 욕구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 이 운동의 근본 정신이었다.
루마니아의 시인 차라, 독일의 작가 후고 발, 리하르트 휠센베크, 스위스의 화가 장 아르프등이 선도자가 되었는데, 이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또는 전후에 세계로 급속히 확대되었다.
독일에서는 반전운동과 코뮤니즘에 결합된 베를린 다다가 1919년에 결성되었다.
퀼른에서는 아르프, 에른스트, 요하네스 바르겔트에 의해 전람회가 개최되었다. 하노버에서는 쿠르트 수비터스가 메르츠빌트를 창안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초기에는 다다운동이 거의 전 유럽과 미국에까지 미쳐 1922년 파리에서 대규모의 국제전이 개최되었다.
그리고 24년 초현실주의가 발족되면서 해체되었다.
미국에서는 1912년경부터 프랑스의 화가 마르셀 뒤샹이 만 레이와 함께 뉴욕의 화랑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뉴욕 다다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적인 경향으로는 소위 레디메이드의 오브제 또는 움직이는 오브제, 콜라주 또는 앗상블라주로 통하는 메르츠 빌트등이 시도되었던 점이다. 기계적, 성적인 이미지의 사용도 특색이다.
이들 수법은 다다의 강렬한 가치 부정적 관념과 함께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60년대 예술 등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는 191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까지 약 20년동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났던 전위적인 문학·예술운동이다.
다다이즘과 미래주의등 20세기에 등장한 다른 전위운동에 비해 제1차, 제2차 세계대전동안 가장 폭넓게 확산되었으며 논쟁적인 예술운동이었다.
초현실주의는 근본적으로 경험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애썼으며 현실을 본능적이고 잠재적인 꿈의 경험과 융합시켜서 논리적이며 실재하는 현실,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시켜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현실에 도달하려 했다.
이 운동을 예시한 미술가들은 보쉬, 아르침볼드, 피라네시, 고야, 롭스, 그리고 연대에 와서는 르동, 키리코 등으로 환상적이면서도 기이한 면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보였다.
이들과 비슷한 특징 때문에 샤갈 또한 이 운동의 선두주자로 언급된다.
미로, 아르프, 마송, 에른스트같은 화가들은 프로타주와 꿈의 현실적 재생산 사이를 넘나드는 기법을 통해 시각적인 등가물을 창조하려고 했다.
초현실주의 회화의 가장 특징적인 면은 과거에 꿈을 그린 그림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은 비기능적이거나 전혀 기능성이 없으면서도 정교하게 구성된 물체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대상을 그들의 규범적인 대에서 끌어내려 진열함으로써 다다이스트인 뒤샹과 피카비아의 방법을 이어받고 있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열광은 1930년대 이후로 점차 줄어들었지만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소규모로 유지되고 있다. 20세기 미학에서 이 운동의 중요성은 이러한 것에 대한 관심이 없던 때에 놀랍고도 이국적인 것의 부활을 보여주었다는데 있다.
추상 표현주의
일반적으로 1940년대와 50년대에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미국 회화사상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회화의 한 양식이다.
본래 추상 표현주의라는 용어는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에 대해서 사용했던 말로, 미국의 평론가 알프레드 바가 1929년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칸딘스키의 초기작품에 대해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을 썼었다.
이 용어가 부적당하다는 견해도 있어서 비평가가 해롤드 고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추상표현주의는 서구 근대미술의 복합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야수파, 표현주의, 다다이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는 한 계보와 인상주의, 입체파, 기하학적 추상의 계보를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미국 화단에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지방주의가 지방적인 형식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추상적이거나 표현주의적인 경향의 미술이 새롭게 등장했다. 전쟁을 피해 도미한 유럽작가들이 큰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마르셀 뒤샹, 모흘리 나기, 조셉 앨버스, 몬드리안, 마타, 달리등이 '금세기 예술'이란 화랑에서 미국 작가들과 관계를 맺었고, 그 후 미국 미술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추상 표현주의는 회화에 있어서 무의식성을 강조한 초현실주의의 자동 기술법에서 강한 암시를 받았다.
실제로 추상표현주의는 이 점에서 추상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추상과 동일하지 않다. 전통적인 추상은 구상 회화의 경우처럼 인간, 사물, 풍경등을 표현 대상으로 삼지 않지만 삼각형이나 원 따위, 선이나 면에 의해 생성되는 형상을 갖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것은 현대 회화의 한 특성으로 화면은 원근감을 잃고 평면화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라운드와 전경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추상표현주의는 구상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간에 지시성과 방향성을 거부한다.
추상표현주의는 1951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미국 추상회화·조각전'을 계기로 주도적인 미술운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1951년과 1961년 사이에 이 운동은 미국 전역과 세계 각국으로 파급되었다.
그러나 1960년을 정점으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된다.
추상표현주의는 라인하트, 뉴먼, 로드코, 머더웰등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일어난 색면파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옵 아트
옵티컬 아트 즉 '시각적인 미술'의 약칭이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추상미술의 한 동향으로 팝 아트의 상업주의나 상징성에 대한 반동적 성격을 띄고 있다.
옵 아트는 미술품의 관념적인 향수를 거부하고 순수하게 시각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고자 했으며 다이나믹한 빛·색·움직임의 가능성을 추구한다.
옵 아트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계열이 있다.
키네틱한 옵 아트와 평면상에서 구성하는 회화적인 옵 아트가 그것이다.
옵 아트는 팝 아트와 같이 시사적인 자극이라든가 정서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과도하게 지적이고 조직적이어서 차가운 느낌을 준다.
옵 아트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가능한 방법으로 시각적 영역을 확대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비재현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옵 아트의 선구자는 몬드리안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오늘날 이 미술의 독창적 실천자이자 주요 이론가인 빅토르 바자렐리의 작품에서 주로 유래하고 있다.
옵 아트가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1965년 열린 '응답하는 눈전'을 계기로 해서였다.
색면파(색면추상)
색면파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걸쳐 일어난 미국 회화의 한 경향이다.
1950년대에 바넷 뉴먼, 마크 로드코와 같은 작가들이 폴록의 화면의 개념에다 색채에 대한 관심을 결합시킨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형태를 소수의 단순한 모양으로 감축시키고, 캔버스를 거대한 규모로 확대시킴으로써, 때때로 순수한 색깔의 화면에서 발생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뉴먼과 로드코는 궁극적으로 순수한 시각에 근거를 둔 미술에 도달하고자 했으며, 색깔 간의 수평적이고 수직적인 분할에 있어서 극히 협소한 표면을 명료하게 함으로써 색면을 연속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케네드 놀런드, 모리스 루이스, 쥴즈 올리츠키와 같은 미술가들에 의해 인계되었다.
'색면'은 진 데이비스와 래리 푼즈의 보다 시각적인 그림에서 출발점이 되었으며 한편 그 급진적인 단순화와 내부의 형태를 캔버스의 장방형 구성에 연관시킨 경향은 미니멀 아트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미니멀 아트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최소한의 조형 수단으로 제작했던 회화나 조각을 가리킨다.
여기서 최소한이란 일루전의 극소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회화의 감동, 마티에르의 풍부함 내지 자기 표현은 곧 예술이라는 신화를 기본으로 하는 종래의 예술 개념을 거부하는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다.
추상 표현주의가 초자아를 표현하여 관객에 호소하는 입장을 취했고 팝 아트가 문명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성격을 띠었던 데 반해, 이들은 엄격하고 비개성적이며 소극적인 화면을 구성했다.
말레비치의 작품은 캔버스 위에 그려진 것은 모두가 회화가 될 수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하며, 뒤샹의 레디 메이드는 어떤 오브제라도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미니멀 아트는 그 개성적인 성격, 극단적인 간결성, 기계적인 엄밀성등이 장점인 동시에 한계가 되고 있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엘즈워드 캘리, 프랭크 스텔라, 도널드 주드, 케네드 놀런드, 잭 영거맨, 래리 푼즈, 모리스 루이스 등을 들 수 있다.
팝 아트
196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구상 회화의 한 경향이다.
'팝'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포플러(popular)'의 약자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 통속적인 이미지, 다시 말해서 일상 생활에 범람하는 기성의 이미지에서 제재를 취했던 이 경향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팝 아트가 일반화된 것은 1962년 뉴욕의 시드니 제니스 화랑에서 열렸던 '뉴 리얼리스트 전' 이후의 일이나, 영국에서는 이미 10년 전부터 그 전조가 된 예술 활동이 있어 왔다.
1950년대 초부터 리처드 해밀튼,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등의 작가들이 모여 대중 사회의 문화, 예술, 매스 미디어와 같은 문제들을 토론하고 전시회를 개최함으로써 팝 아트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미국의 팝 아트는 1950년대 초기의 미국 화단을 휩쓸었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미국의 팝 아트는 미국으로 상징되는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선배 작가로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재스퍼 존스를 들 수 있다. 미국의 팝 아트는 흔히 발견되는 일상적인 이미지나 물체를 미술 작품으로 전환시키는 것으로 목표로 하고 있 다.
팝 아트의 작가들은 일상의 이미지를 인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기호나 기호체계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앤디 워홀, 로히 리히텐스타인등은 사회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 - 예를 들면 마릴린 먼로의 얼굴,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 - 을 작품 속에 도입함으로써 기초 체계와 그들 자신의 테마를 겹쳐서 표현하고 있다.
극사실주의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경향의 회화와 조각을 일컫는다.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극히 생생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특징으로 한다.
주관을 적극 배제하고 어디까지나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과 같이 극명한 화면을 구성하는데 주로 의미없는 장소, 친구, 가족등이 대상으로 취급된다.
극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미국적인 사실주의로, 특히 팝 아트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팝 아트처럼 평상의 생활 즉 우리의 눈앞에 늘 있는 진부한 이미지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팝 아트와는 달리 그것은 극히 억제된 것으로써 아무런 코멘트도 없이 다만 그 세계를 현상 그대로 다룰 뿐이다.
극사실주의는 미국적 즉물주의(卽物主義)의 발상, 또는 미니멀 아트의 몰개성주의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종래의 추상미술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이라는 의미와 사진 그 자체와 양쪽에 대한 아이러니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척 클로즈, 하워드 캐노비츠, 맬컴 몰리, 필립 펄 스타인, 시드니 틸림등의 작가가 있다.
극사실주의가 조각에 적용될 때에는 삼차원이라고 하는 조각의 기본 요건에 따라 한층 실물에 가까워진다.
듀안 핸슨과 존 드 안드레아의 작품은 한치의 엇갈림도 없는 충격적인 실물을 제시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은 지난 20세기에 걸쳐 서구의 문화와 예술, 삶과 사고를 지배해온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기 모더니즘은 하나의 통일된 사조나 운동은 아니지만, 그 중심적 동기는 모더니즘을 통해 수립된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엄격한 구분, 예술의 각 장르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건축 비평가들이었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 유행하던 엄격한 사각형 형태의 양식에 대한 반발로 나온 건축물에 대해 쓴 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스트 모던'적 경향이 분화되지 않은 과거의 예술을 소생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시대, 다른 문화로부터 양식과 이미지를 차용하는 예술은 모두 '포스트 모던'의 자격을 얻는다.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또 다른 주된 특징은 무더니즘적 문화와 사고 방식이 세워놓은 엄격한 지배의 틀을 거부하는데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소통이 불가능한 정치, 문화, 전문화의 영역을 깨뜨리고, 삶과 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예술에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끌여 들여 비판적으로 다룬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아직은 확정된 일관성 있는 체계는 아니며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욕망에 의해 촉발된 회의주의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이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의 폐허를 헤치고 나가며, 모더니즘의 부정이라는 가시적인 대안을 세우려 노력한다.
개념주의
1960~1970년대에 '미술대상물의 非물질화'를 겨냥하는 이 反형식주의 운동은 미술은 관념이나 그 수행의 과정에 있는 것이지 그 결과로 나타나는 대상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개념미술가들을 작가와 '감상자'들 사이에서 이윤을 올리는 중개인 역활을 하는 화랑이나 평론가들에 반대했다.
그들은 작품 또는 '정보'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작접 전달되기를 바랐다. 사진이 이 미술과정의 전달이나 문서화의 방법으로 선호되었고 책이나 팸플렛, 신문, 그림엽서, 도표, 지도들도 즐겨 사용되었다. 개념주의는 끝없는 여러가지 유형의 非시각적이고 뇌의 작용을 더하는 활동이나 이벤트 등을 포함했다.
어휘나 언어가 일반적으로 주요한 요소로서 사용되었다. 조세프 코수드의 경우 미술 用語에 대한 사전의 정의들을 사전복사로 확대했고 존 볼데사리는 '이야기 미술'을 만들었는데 이는 미술사의 '주요 기념비적 존재' 옆에다 미술에 관한 이야기들을 인쇄한 것이었다. 이는 대상물을 없애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 두 가지 작품들은 '생각'으로서 출발했으나 그후 판매 가능한 '미술'이 되었다. 그리고 1970년에 개념주의에 관한 전시회를 위해 현대미술관이 만든 카탈로그는 수집가들의 귀중한 수집대상물이 되었다. 개념 주의로 부터 파생되어나온 것이 대지작품, 현물작품, 행위미술, 신체미술 이었다.
조셉 쿠수스
서양 고대미술
서양의 고대 미술은 일찍부터 문명이 발달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로마 미술들로 주로 집이나 무덤의 벽에 그린 그림들이 많다.
고대 이집트 무덤의 벽에는 신과 여신, 사냥, 축제의 장면이 주로 그려져 있다.
그리스의 미노스 화가들은 집과 궁전에 춤추는 사람, 새, 꽃 등을 그렸고 로마의 화가들은 신과 여신, 고대 신화의 장면을 주로 그렸다.
이집트 시대(B.C.3000 ~ 300)
이집트는 관개 조직을 통제하는 중앙 집권적인 통일국가의 필요성이 다른곳보다 먼저 일어나, 한 왕아래 통일국가로 일찍 시작된다. 그것은 왕권의 확립이면서 동시에 제정일치의 신권의 확립이었다. 따라서 왕에게 봉사하는 것이 내세에 대한 저승살이의 생을 확보하는 것과 같았던 이집트 미술은 이 시대에 그 스타일을 확립하여 발달하였다.
제1왕조의 분묘는 선사시대의 장례관습대로 완여벽돌의 벽에다 나무 기둥으로 받쳐진 통나무를 나란히 덮은 천장의 것이었다.
곧 마스터바 형식의 분묘가 나타났으며 이것은 다음 시대에 가서 피라밋 형식 발달의 기초가 되었다.
조각상으로는 제2왕조의 '카세켐왕의 좌상'이 있으나 소형이다. 그러나 부조는 발달해서 '사왕의 비'에는 매를 나타내, 왕이 호루스신의 후예임을 상징하고 있다. 그 발 아래에 궁전을 표현했다. 이처럼 간결하며 뚜렷한 구성은 그 후 오랫동안 이집트 미술의 전통으로 전해졌다.
여기에는 사람이 죽고 난 후 저승에서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 자기의 모습을 남긴다고 하는 종교적 풍습이 이미 정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집트에서는 왕권의 확립과 함께 신권도 확립되었으며, 이것은 곧 종교미술인 이집트 미술의 전통으로 이 시대에 세워졌다는 것을 동시에 나타내는 것이다.
제3왕조부터 고왕국 시대 도시 유적은 아부·라와슈, 기자, 삭카라, 메이둠 등에 남아 있다.
새로운 제3왕조는 수도를 멤피스 시에 세웠는데, 새 왕조가 이곳에 들어서서 아피스신인 성우를 석관에 모신 '세라페움'은 유명하다.
당시 멤피스 근교의 삭카라에서는 거대한 석조건축이 출현하였는데 그것은 높이가 9.6m, 둘레가 1.6km나 되는 네모형의 석회암의 벽에 드리운 복합적 건조물이다. 여기에는 입구의 열주랑, 예배당, 집무실등이 달려 하나의 거대한 모뉘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피라밋의 모양은 석재를 수평방향으로 엄격하게 배치한 아주 간소한 것으로, 거기에 아무런 장식성도 없고, 상승하는 리듬과 넓직한 기저부와의 관계속에 얼굴을 하늘에 향하고 발을 굳건히 땅에 짚은 초연하고도 도도한 파라오의 절대적 권위가 상징되어 있다.
이런 통합적인 모뉘망을 구상한 사람은 제세르왕의 재상인 임호텝이며, 이처럼 엄정한 기하학적 감각과 대담한 설계를 결합시켜 후에 전이집트 건축의 규범으로 될 형식의 선구자로 되었다.
제 4 왕조때는 피라밋이 많이 건설되었다. 마스터바를 여러개 겹쳐 올린 모양의 계단식 피라밋에 그 계단모양의 부분을 전체적인 3각형 모양에 맞추어 미끈하게 메꾸었다. 왕의 분묘에는 이런 피라밋 형식의 것이 채용되었다.
이러한 분묘건축이외에 고왕국 시대의 신전 건축의 유구에는 볼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이집트에 힉소스의 침입으로 인한 문란기가 시작되어 공백시기를 가져오게 했으나 나중에 제18왕조가 서서 아멘호텝 1세가 다시 이집트를 완전히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지방 호적의 약체화 정책에 의한 중앙집권의 결실이 맺어짐과 동시에 밖으로는 유프라테스 강변에까지 판도가 넓혀짐에 따라서 이집트 사상 최고로 위세가 올랐다. 그러한 위세는 미술에도 잘 나타나고 있어 건축에는 장대한 대규모의 신전들과 호화스런 암굴분묘들, 조각에는 거대한 조상 등이 제작되고 동시에 서아시아제국의 호화취미가 가해져 종래의 양감있는 단순하고도 엄정한 조각형식 위에 복잡한 장식성과 우미함이 가해지게 되었다.
또한 이 시대는 이집트 미술사에서도 잊을 수 없는 획기적인 아멘헤텝 4세의 종교개혁이 있었고 종교가 모든 미술활동의 근간으로 되어 있는 이집트에서는 이 개혁이 큰 변동을 주게 되었다.
고왕국 시대 이상으로 활발한 건축의 경우 수도 테베의 동안 '카르낙의 아몬신전'은 고대이집트 최대의 규모이다. 신왕국시대의 역대 왕들이 최대의 정성을 다해 조영한 신전·분묘가 그토록 크고 호화찬란했던 것은 그만치 나라의 정치·경제 사정이 사상 최고도로 발전된 사회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호화취미를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은 유일한 미도굴의 '투탄카멘의 묘'에서다. 그리고 거대한 상은 '멤논거상', '라메세움'등이 있다.
신왕국시대에는 회화도 성행하여 이집트 미술사에 걸작들을 많이 남기고 있는데 화려하고 유창한 시대취미가 비교적 자유스런 그림 형식을 택하게 했는데 '낙트의 묘' '멘나의 묘' '라모세의 묘' 그리고 '왕능의 계곡'의 분묘군등에서 회화 스타일의 발전 경위를 정리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시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의 두 강 사이에 있는 광대하고 비옥한 관개지역에 형성된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4,000년경에 문명이 나타났다.
이 지역은 사방이 트여 있어서 여러 도시 국가간의 항쟁과 침입이 서로 교차하는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다. 따라서 미술도 일정하지 않지만, 서아시아 고대의 도시 국가의 절대적 군주를 위한 기념적 양식을 띄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남부의 바빌로니아와 북부의 앗시리아로 대별된다. 이집트의 미술이 영원한 저승에의 영위를 위한 것이었다면 메소포타미아의 그것은 죽음을 무서워했고, 현실의 생에 집착한 강력한 이승의 삶을 위한 양상이 두드러진다.
① 바빌로니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한 이라크의 남부를 바빌로니아라고 했다.
최초의 주민들은 수메르 인들로 기원전 3천년 이전부터 문자를 발명해 그들의 문화와 종교·예술을 고대 서아시아 전역에 전파시켰다. 수메르 인들은 전반적인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예술·종교·문학에 있어서도 후세인이나 고대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예술가와 장인의 구별이 없었으며 그들은 모두 존경을 받았고, 그들의 기술을 지혜의 화신인 에아신에게서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3천년 초 바빌로니아의 도기 제작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앗시리아의 아르파시야와 이란의 수사에서 출토된 도기는 모양도 아름답고 채색한 장식의 취향과 기술도 뛰어났던 것을 보여준다.
바빌로니아의 건축에는 진흙과 짚으로 만든 벽돌과 삼목이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궁전이나 신전의 외벽은 화려한 장식을 붙여 치장했으나 내구성이 없는 진흙 벽돌로만 되어 있어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바빌론의 건축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바빌론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는 약간 튀어나온 버팀벽이 달린 정면과 계단을 쌓거나 삼각형 모양으로 된 수직의 수로와 총안이다. 또 가장 독특한 건축물은 '지구라트'라고 하는 거대한 계단식 탑이다. 이것은 모든 주요 신전에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거대한 진흙 벽돌을 층층이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게 쌓고 꼭대기에는 성전을 만들어 바깥 계단으로 가게 되어 있다.
기원전 2500년경에는 팔장을 낀 자세의 자연스러운 환조 석회석상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돌 공예의 진정한 매체는 저부조이다. 벽화와 함께 발달한 이 부조는 채색이 되어 있으며, 입체적 효과를 덧붙인 정교한 벽화의 변형이다. 벽화는 고운 바탕의 흰색 석고벽에 검은색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붉은 색과 검은색과 칠했으며, 청·황·노색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벽화는 전형적인 왕실 의식·제사·서임식·사자의 사냥 장면등을 묘사한 것으로 릴리프에서와 같이 인습에 따라 머리와 다리는 옆 모습, 몸통은 앞 모습이며 눈은 보통 앞을 바라보고 있다.
바빌로니아 고유의 특징적인 조각은 매우 단단한 돌로 만든 작은 원통형 도장에 무늬를 조각한 '미니아튀르'이다. 기원전 5천∼3천년 사이에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된 이 도장은 서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발달 순서가 분명히 나타난다.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아카드 시대에 제작된 것들로 주제도 흥미롭고 완성품의 아름다움도 뛰어나다.
그 외에 조개나 유리·돌·상아로도 모양을 만들고 조각을 해서 큰 작품을 장식하거나 모자이크 조각으로 사용했다. 동이 사용된 예는 유사 이전에도 발견되었으나 많은 양을 사용하고 또 장식용으로 금속을 쓴 것은 바빌로니아인들이 최초였다. 그들은 금·은·동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처음에는 망치로 두들겨 펴서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 적조물로 신전이나 궁전 입구에 괴물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② 앗시리아(기원전 1,000년경 ∼ 612)
앗시리아 미술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슈메르·악카드의 전통을 잘 소화시켰고 그 위에 전혀 다른 경지를 열어 고대 오리엔트 미술에 하나의 새로운 유형을 명확히 창조해 그 지리적인 환경에 따라 시리아, 소아시아, 더 나아가 에게해 주변의 미술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앗시리아 미술의 새 경지란 공적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어서 외정(外征), 향연, 사자사냥등을 주제로 한 묘사가 아주 구체적이며 기록성을 중시했다. 특히 동물의 표현에는 박진감 넘치는 사실성을 발휘하고 있다. 현실주의 스타일로 강력한 힘의 표현을 하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생에 대한 억척스러운 집착을 고집하는 성격을 이런 앗시리아 미술에서 볼 수 있다.
그리스 시대
북방에서 그리스 본토로 이동해 온 도리아족은 선주 민족을 정복하고 이들의 문화에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더하여, 서양 문화의 모체인 눈부신 그리스 문화를 만들었다.
그리스인은 초기에는 이집트인처럼 형태를 중시한 개념적인 작품을 만들기는 했어도 생각하는 근본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생각했고, 또 세계 최초의 민주정치를 발명한 그들의 마음 밑바닥엔 현실의 인간을 모든 세계관의 척도로 하는 사고법이 있었다.
이 정신이 미술을 형식주의에서 탈피시켜 바로 자연주의에로 이행시켰던 원인이었다.
그리스 미술의 특징은 이상미, 조화미, 균형미를 추구하고 인간 중심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건축으로는 신전 건축이 중심이고 조각은 수학적인 비례에 의해 인체의 이상미룰 추구하고자 했다. 그리스 미술은 서양 미술의 근원이라 칭한다.
그리스 미술은 세 시기로 구분한다.
① 아르카익 시대(기원전 7세기~6세기)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의 아르카익 시대에는 소박하고 신선한 미를 추구했다.
소아시아,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인상 조각으로 대표된다. 정면성의 법칙, 치졸한 안면 표정, 이른바 아르카익 스마일이라 불리는 미소를 특색으로 한다. 아르카익 초기의 조각은 강한 정면성(正面性)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훗날 그리스 조각이 개척한 충실한 관찰에 기초하는 자연적인 표현과 거리가 멀다. 육체의 각 부분의 조립을 사실에 입각한 묘사적 의지에 의하기 보다는 견고한 형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구축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개발 정신으로 현대 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미술을 탐구하고, 도입한 선구자들은 코레의 '소녀상', 코우로스의 '청년상' 등이 대표적이다.
아르카익 시대 중기로 가면 주제와는 관계없는 가로 기어 다니는 뱀이나 괴수를 박공벽 끝의 좁은 공간에 넣어 공간을 해결하였다.
이 시대의 말기로 가면 그리스 미술 특유의 충실한 관찰을 기본으로 한 묘사가 더해져서 하르카익 초기의 구성주의는 뒤로 밀려 나갔다. 그것은 아르카익 스마일의 소실이고, 유각(遊脚)의 탄생이었다.
② 클래식(고전) 시대(기원전 5세기~4세기)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의 클래식(고전) 시대에는 조화미, 이상미를 추구한 그리스 미술의 전성기였다.
아르카익에 나타난 그리스인의 창조력은 클래식 시대로 가면 묘사주의의 확립을 가져왔다.
이 클래식 시대의 전기에는 저명한 3인의 조각가가 있었다.
뮈론, 페이디아스,폴뤼클레이토스이다.
뮈론은 운동의 순간적인 자세를 표현하는데에 재능을 발휘했다. 감정의 절제된 운동미를 잘 표현한 '원반 던지는 사람' '아테네와 마르쉬아스'에서 볼 수 있는 뮈론의 의도는 예리한 관찰에 의해 인체의 구조를 밝히며 그것을 묘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페이디아스는 동시대사람들로부터 '신 그것을 나타냈다'라고 할 정도로 칭찬되었는데 조각의 형태를 통해서 그 배후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했다. '파르테논 신전의 장식 조각', '렘노스 섬의 아테네 여신상', '아테나·렘니아'는 이런 페이디아스의 특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
페이디아스의 이런 정신 내용을 드높이려는 이상주의에 대해서 외형의 이상미를 추구한 것이 폴뤼클레 이토스이다. 그는 인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두부가 전신의 7분의 1일 때 드러난다고 하여 '창을 든 사람' '승리의 머리띠를 매는 사람'을 만들었다. 미를 수치로 나타내려는 데에 그리스인의 이지적·합리적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신전 건축은 장중하고 남성적인 도리아식과 우아하고 여성적인 이오니아식 신전이 발달되는데 도리아식의 대표적인 것으로 익티노스가 설계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데 파르테논 신전은 페이디아스의 조각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오니아식 신전의 대표적인 것으로 '에렉테이온 신전' 과 '니케 신전' 이 있다.
③ 헬레니스틱 시대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의 헬레니스틱 시대는 세속적이고 감성적인 화려한 미를 추구했다.
격동적이고, 극적이고, 관능적인 것은 클래식 시대와는 다른 방식이다. 자연이나 현실의 관찰이 세밀해지고 사실 묘사가 행해져 초상 조각이 발달하기도 하고, 소재 범위도 확장되어 노인·다른 인종·동물들과 그 밖에 세속적인 것들이 다루어진다.
관능적인 묘사로서는 많은 비너스 상이 있는데 헤르메스와 '크니도스의 비너스', 밀로섬에서 출토되어 8등신의 비례미를 잘 표현한 '밀로의 비너스'가 있다.
운동감을 주는 표현으로는 사모트라케에서 출토되어 날개·옷주름등을 이용하여 움직임의 착각을 강조한 '니케 여신상', 격정의 표현으로는 '라오콘 군상', '페르가몬의 제우스 제단의 부조', 다른 인종과 결합한 것으로는 '죽어가는 갈리아 인', '자살하는 갈리아 인과 그의 부인' 등의 조각이 있다. 헬레니스틱 문화는 서로는 로마에 유입되어 서양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동으로는 인도에까지 이르러 간다라 미술과 아쇼카 왕 치하에서의 불교 미술을 탄생시킨다.
로마 시대(기원전 1000년~395년)
그리스는 로마에 정복당했으나 로마의 문화는 그 전부를 그리스에서 배웠다.
로마의 미술은 그리스의 문화와 미술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실용적인 것이 특징이다.
건축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띤 공공 건축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설립되었다. 로마 건축 역시 그리스의 건축을 계승시킨 것이어서 그리스 식의 열주식 건축과 에투루리아적인 아아치형, 사라렌적인 도움형을 융합시켰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콜로세움의 원형경기장, 바실리카 공회당, 콘스탄티누스 기념문등이 있다.
조각은 황제나 장군 등의 초상 조각을 중심으로 사실적인 성격이 특색이다.
아우구스투스상, 카라카라, 아그리파, 케사르가 대표적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 우스 기마상도 독특하다.
회화는 원근과 명암을 표현한 프레스코와 모자이크 기법이 발달하였고 폼페이 벽화가 대표적이다 pard\plain
구성주의 [붉은 미술]
[붉은 미술]로 명명되어지는 러시아 구성주의는 1920년대 비평가들에 의해 현대미술의 무정부주의적, 공산주의적인 면과 이데올로기로는 볼셰비키적 영항력 아래 저속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광적인면에 대한 비평을 낳게 한 주의다. 철저하게 마르크스주의적 이념을 표현하고 혁명적 공산주의 기구와 관련된 미술이다.
구성주의의 핵심은 예술가가 기계적 생산과 건축 공학 및 그래픽과 사진을 통한 의사전달에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다. 사회 전체의 물리적, 지적 요구의 질을 향상시킬수 있다는 깊은 확신의 표현인 것이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사상적 열망을표현하며 감정을 조직하고 체계화시키는 것이 목표로서 예술의 사회화 승화였다.
19~ 20세기 초 루이스 설리반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헨리 반 데 벨데와 미래파의 안토니오 산텔리아 등이 먼저 생각하고 있었던 예술가, 창조적 디자이너는 과학자와 공학기사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사고이다.
장식을 탈피하고 건물과 단순한 기본 형태에 내재한 순수성을 강조하며, 새롭게 공업재료와 기계 자체속에 특유한 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건축학적 원초주의 :알렉산더 로드첸코의 작업방법은 자와 컴퍼스만을 이용)물질적 생활의 생산방식이 인간 생활의 사회적, 정치적, 지적과정을 결정한다는 유물론적인 마르크스의 논점과 일치하며, 기계의 필수적인 조건이 인간의 의식과 그것들을 시대를 반영할 새로운 미학을 창조한다고 믿었다.
텍토닉(Tectonic)
- 사회적 유용성과 편리한 재료에 바탕을 둔 기본개념. 내용과 형태를 융합 하는 전체이념
팍투라(Factura)
- 재료 자체의 원래 성질의 실현과 제작과정 중의 재료의 특수한 조건으로 그 재료의 변모를 뜻함.
-> 재료의 전체성(재료 자체의 원래 성질은 손상시키지 않고 완전히 살려냄) 유래.프룬(Proun)
- 새로운 미술품이란 뜻의 러시아말의 준말
블라디미르 타들린 ( 1885 - 1956 ) 러시아 구성주의 기초를 이룬 사람.
- 목공예와 금속 공예, 영화 연극무대 디자인, 글라이더 실험, 노동자 작업복
- < 제 3차 세계 노동자동맹을 위한 기념비 > 회화,조각 및 건축과 국가의 홍보 및 선전기구의 통합
을 보여주는 상징물 우주시대의 역동성에 대한 나선형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엄청난 신앙.
: 구상주의의 높은 이상과 그 상징이 되는 기하학은 러시아의 과학기술을 반 영하지 못하고 일종의 상징적인 진술로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영감에 찬 찬 미밖엔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도면상에 남아 있는 것이 많다.
알렉산더 로드첸코 ( 1891 - 1956 )
- 블라디미르 타들린과 함께 작업
- 활판인쇄 , 포스터, 가구 디자인 및 잡지의 삽화, 사진과 영화분야에 두각
- 모든 사물을 혁명적 맥락으로 봄
블라디미르 타들린[제3인터내셔날 기념탑]
극사실주의 미술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새로운 경향의 회화와 조각. 같은 시기에 독 일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시도된 비슷한 경향의 미술을 포함시키기도 한 다. 슈퍼리얼리즘, 포토리즘, 스튜디오 리얼리즘, 샤프 포커스 리얼리즘 등 여 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며,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극히 생생하고 완벽 하게 묘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주관을 적극 배격하고 어디까지나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과 같이 극면한 화면을 구성하는데, 주로 의미없는 장소, 친구, 가족 증이 대상으로 취급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캔버스에 감광제를 발라 사진 을 직접 프린트한 작품도 있다. 사진기의 눈이 포착한 영상은 사실인 것이 확 실하지만 그것도 결국 실물로부터 떨어져서 자립한 일종의 허구일 따름이다. 물론 이러한 허구는 새로운 현실일 수 있다.
극사실주의는 본질적으로 미국적인 사실주의로, 특히 팝아트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팝 아트처럼 평상의 생활 즉 우리의 눈앞에 늘 있는 진부한 이미지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팝아트와는 달리 그것은 극히 억제된 것으로써 아무런 코멘트도 없이 다만 그 세계를 현상 그대로 다 룰 뿐이다. 그로나 감정을 배제한 채 기계적으로 확대한 화면의 효과는 매우 충격적이다. 우리가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었던 추악함 - 모발에 가려진 점 이라든가 미세한 흉터까지도 그대로 클로즈업되어, 보통이이라면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사실성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잔혹한 인상을 받게 만든다.
극사실주의는 미국적 즉물주의 의 발상, 또는 미니멀 아트의 물개성주의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종래의 추상미술로부터의 완전한 이 탈리아는 의미와 사진 그자체와 양쪽에 대한 아이러니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작가들은 팝 아트의 작가들보다 대체로 한 세대쯤 젊은데 작품제작에 사진이나 슬라이드를 직접 간접으로 이용하는 척 클로즈, 하워드 캐노비츠, 맬 컴몰리 등과 사진을 이용하지 않고, 직접 자연의 풍경이나 모델만을 대상으로 하는 필립 펄스타인, 시드니 틸림 등의 두 계열로 나뉘어진다. 극사실주의가 조각에 적용될 때는 삼차원이라고 하는 조각의 기본 요건에 따라 한층 실물에 가까워진다. 듀안 핸슨과 존 드 안드레아의 작품의 한치의 헛갈림도 없는 충 격적인 실물을 제시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다다이즘
제1차 세계대전(1914~18) 말엽부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이다. 다다(dada)라고도 한다. 조형예술(造形藝術)뿐만 아니라 넓게 문학·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한다. 다다란 본래 프랑스어(語)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木馬)를 가리키는 말이나, 이것은 다다이즘의 본질에 뿌리를 둔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슬라브어의 긍정사(다 da,다 da)의 형태와 다다 dada라는 말의 형태가 어원상 유사성이 있다고 짐작할수 있다.
*다다라는 말이 사전을 펼치는 도중에 우연히 발견 되었다고 한다.
*다다는 프랑스어로 장난감 목마를 뜻한다.
*루마니아어로 예,예-그래,그래의 뜻이 있다.
*독어의 유모차와 생식의 기쁨간의 관념의 연상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당시 신문에서는 아프리카의 크루족이 제물론 바쳐진 암소꼬리를 다다라 부른다고 보도했다.
*이탈리아의 어느지방에서는 주사워나 어머니가 다다로 불리워진다.
산업혁명이후 급속히 변화한 물질과 인간과의 관계속에서 합리적이라 여겨졌던 문명이 1차대전을 야기하게되자 물질 문명의 결과로서 노출된 인간이 자기 위치에 회의를 인식하게 되었는데 예술적 조류들에 의해서 만이 아니라 시민 사회에서 발전되어나온 制度藝術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게 된다.
다다라는 용어를 누가 처음 사용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누구라고 명확하게 가려내기가 어렵지만, 그것이 탄생된 장소는 반박의 여지없이 취리히이다. 1차대전이 한창일때 이 도시에는 몇몇 독일인들이 피신해 잇었고 그 중에는 시인 휴고 발과 그의 애인 에미 헤닝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1916년 2월 5일 카바레 볼테르라고 하는 문학적이고예술적인 카바레를 열었다. 며칠후 휴고 발과 그의 동향인 리하르트 휄젠벡, 루마니아에서 이민온 트리스탕 짜라와 마르셀 얀코, 알자스인인 쟝 아르프등이 모여 다다를 탄생시켰다. 다다라는 단어는 휴고 발이 <카바레 볼테르>라는 제목으로 취리히에서 발간하던 "문학 및 예술에 관한 글 모음"에 1916년 5월 처음으로 인쇄되어 발표되었다. 역시 1916년에는 트리스탕 짜라의 <안티피린씨의 최초의 천상 여행>과 쟝 아르프가 삽화를 그린 휄젠벡의 <환상적인기도> 등 두권의 책을 펴냄으로써 다다 총서도 시작되었다. 이어서 1917년 3월에는 다다 화랑이 취리히에 문을 열었다. 짜라는 다다운동 진행에 큰역할을 했다. 그는 1918년에 <다다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그 이론적 배경을 제시했으며, 1919년 파리로 이주한 이후로는 국제적인 아방가르드 무대에서 다다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물론 스캔들과 논쟁을 도발시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다는 전통에 반대하고, 합리적인 것에 반대하며, 제도에 반대하고, 모든 것에 반대한다. 그 기본적 원칙은 부정이다. 마르셀 뒤샹의 성상 파괴적인 예술관도 다다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전쟁은 허다한 젊은 미술가들과 시인들의 불만에 새로운 근거와 긴박성을 부채질하였다. 전쟁은 탐욕과 물질주의에 입각한 사회의 단발마적인 고통이었다. 그들은 다다를 이 사회를 위한 진혼곡으로 이해했으며 새로운 사회의 원초적 출발로 보았다. 미술가외 시인은 유산 계급 자본주의와 교묘하게 밀착되어 예술은 문자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상거래 행위가 되어버렸고 미술가는 정신적 용병이고 시인들은 언어의 은행가가 되어버렸다. 예술가로서 다다이스트는 당연히 그 파멸해가는 사회에 속한 자신들의 모습에서 그 예술의 파괴를 시도한다.
"無에의 정신"은 다다이스트 들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원시 부족예술에 눈을 돌리게 하였으며 초현실주의에 와서는 다다의 예술 부정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하의 세계 즉 잠재적 무의식의 세계를 비 합리적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시도 하였는 데 이것은 쾌락원리와 현실원리를 화해하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원시인들의 2원적 세계관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슴을 알 수있다.
다다의 메세지는 유럽적 가치관은 이미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또한 그것은 지금까지 용인된 모든 취미와 이성의 원칙을 거부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즉흥적으로 실행하는 의지의 표시이기도 했다. 다다와 더불어 새로운 현상이 도래하게되었다. 생은 소음, 색채, 정신적인 리듬이 다다예술에 그대로 수용되어 거리낌없는 일상적인 정신상태에서 터져나오는 감각적인 아우성과 열병 그리고 모든 잔인한 현실과 아무렇게난 뒤죽박죽 되어버린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존재의 모든 가치가 발휘되고 또 각개의 사물 생각의 배후에서 밑바닥에서 반대쪽에서 한가운데에서 존재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각각의 사물, 생각이 전도되고 조롱되고 교체되는 일이 그 속에서 벌어지는 자유의 강렬한 물결을 효율적으로 표현한 것이 다다였다.
복잡한 아이러니 속에 그들은 사회와 그 예술의 파괴는 곧 미술가인 자신들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에 다다는 어느 의미로서 그 자신을 파괴하기위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자기 파괴적인 몸짓은 결국 새로운 예술의 부활을 위한 몸부림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파괴하는 아픔을 겪더라도 다시 출발하고 싶어했다. 어린아이가 최초로 한다는 다다라는 말로 그들의 모든것을 설명하려 한것은 이러한 의미로써 설득력을 가진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상징적인 복제(複製)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鐵]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特急機關車)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有機體)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예술은 죽었다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내뱉던 그들은 예술의 파괴를 시도한다. 그것은 곧 허무주의로 연결된다. 그들에게는 일과된 양식이 없었다. 즉 다다이스트들에게는 진정한 합일점이 없었다. 다다는 상이한 지역에서 다소 다른 특성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다다안의 두 강조점을 찾아낼 수가 있다. 하나는 낡아 빠지고 부적절한 유미주의에 대신할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는 계통이다. 또다른 하나는 차라나 피카비아 같이 조소를 파괴의 수단으로 삼고 예술가로서 그들의 사회적 동일성에 대해 공중을 희롱함으로써 그들 위치의 아이러니를 이용하려는 유파다.
여기에 오늘날 말하는 자유분방한 오브제(objet)가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중립(中立)을 선언하면서 스위스에 모인 망명자들의, 밖에서의 참혹한 살육을 의식한 발언이며, 그들은 종래의 예술작품이 외적(外的)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끼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독일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베를린·하노버·쾰른 등 세 곳의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R.하우스만, G.그로스, W.메링 등이 주된 예술가였는데, 여류인 H.헤히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취리히와는 달리 베를린은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하였으므로 다다이즘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하우스만의 아상블뢰즈(assambleuse:여러 가지 오브제 모음)나 헤히의 포토몽타주(2장 이상의 사진을 붙여 중복인화·중복노출 등으로 새로운 시각효과를 노림. 고안자는 J.하트필드라고도 한다) 이외에 그로스의 격렬한 반전(反戰) 시리즈인 《이 사람을 보라》 등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의 군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전후의 황폐,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변해가고 있는 사회 상층계급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는 무산계급의 옹호를 그 특색으로 한, 예리한 시각의 소묘집(素描集)이다. 베를린에서의 다다이즘은 대전이 끝난 18년부터 33년까지 계속되었다.
하노버에서의 중심 인물은 K.슈비터스였다. 슈비터스도 시와 조형(造形)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나타내어 23~32년 잡지 《메르츠》를 간행하고 있었는데 주목되는 작품은 《메르츠바우》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널조각과 잡동사니를 소재로 하여 만든 기둥인데 조각에서 표현한 콜라주(collage)의 선구적 예(例)이기도 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콜라주는 다다이즘의 유력한 무기인데, 일찍이 입체주의(큐비즘)의 P.코레에서도 같은 종류의 경향을 볼 수 있다. 다만 다다이즘의 경우에는 응용하는 소재를 신문지·우표 등에서 우모(羽毛)·철사·성냥개비·화폐 등으로 더욱 넓히고 있으므로 작품 효과는 입체주의 시대의 것과는 현저하게 달라졌다.
슈비터스는 콜라주의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쾰른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M.에른스트와 J.T.바르겔트로 대표된다. 바르겔트는 잡지 《선풍기(扇風機)》의 창간자이기도 하며, 에른스트와 공동으로 제작을 시도한 일도 있는 화가로서 아상블뢰즈를 잘하였다.
에른스트의 기법(技法)은 콜라주이며, 19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주전(展)은 이제까지의 회화개념(繪畵槪念)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그는 1924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독특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타주(frottage)에 새로운 면을 개척했는데, 그것을 보면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과정은 종이 한 장 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파리에 있어서의 다다이즘 운동은 1919년에 이루어졌다. 자살한 23세의 시인 J.바셰 외에 ‘검은 유모어’의 A.브르통 등도 다다이즘의 선봉으로서 빼놓을 수 없으며, P.엘뤼아르, B.페레, L.아라공 등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출품된 M.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裸體)》는 사진가 A.스티그리츠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요소로서의 광채(光彩)라고까지 절찬한 브르통을 포함해서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작품은 순전히 메커니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데도, 마치 고속사진(高速寫眞)의 한 장면과 같이 역동적이며, 미래파(未來派)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후 뒤샹은 기성품(旣成品)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ready made)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M.레이의 《선물》(1921)이냐 뒤샹의 《샘[泉]》(1917)이라고 할 정도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F.피카비아, H.알프, 실험영화로 유명한 H.리히터도 빼놓을 수는 없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의 아방가르드 운동들은 일치된 미학적 실제나 통리된 전망을 보여주지 않았으며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형태의 예술 세례를 퍼부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비평이라기 보다는 반응에 가까운 차원으로 이루어 졌다. 유럽 아방가르드들의 급진적인 예술들은 단순히 놀라게 하거나 독특한 것을 하려거나 새로운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겉모습으로 비추어졌던 결과를 낳은 데에는 충분히 납득가는 이유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 전위예술가들이 예술에 대해 가한 공격은 예술의 허상을 드러나게 하였다. 아방가르드의 공격적 시도로 인하여, 실생활과 떨어진 것으로서의 자율적 예술의 위치가 시민사회내에서 '제도적'인 것이었음이 노출되게 되었다. 진정한 아방가르드는 현실과 예술에 대하여 끊임없이 비판하는 기능을 하는자에게만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옳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기 위하여 언제나 '깨어있는'자일 때에만 그 예술은 새로울 수 있으며, 진보로 향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의 「공격」혹은 다양한 폭력적 형태의 목적과 방법은 「반대」이고 「부정」이며, 관례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것은 「단절」이다. 아방가르드는 급작스러운 불연속성과 불시에 일어나는 운동 및 분열을 나타낸다. 그 정신은 가입과 예속과 참여를 거부한다. 사람들은 비트족의 운동을 「단절」과「거부」,「비동맹」 등으로 말해왔다. 그러나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는 이러한 요소들은 격렬한 도덕적 분노나 거대한「혐오」또는「두려움」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처럼 보이는 아방가르드의 전통 속에서 다시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아방가르드는 현대적인 의식의 일차적인 반응인 무소속감과 반순응주의도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낭만적 개인주의의 특징들인 무소속·고집·계급탈락·「방랑」등「단절」의 양상들을 재현·강화한 것이다."
다다는 아주 다양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모더니즘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것과 미술이란 어떤것이어야 한다는 기존관념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다는 것이다. 즉 미술작품이 성립되는 것은 형태, 재료, 내용, 범주, 기술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술가가 그것을 미술이라고 간주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다다는 일상세계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했다. 그리고 이것은 악순환으로 빠져버려 그곳으로부터 탈피해야만 되었다. 결국 새로운 질서에의 요구가 일고 다다이즘은 막을 내리게된다. 그래서 초현실주의는 다다가 남긴 폐허 속에서 건설을 시작하려는 긍정적인 행동의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다다이즘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네오 다다’라는 명칭으로 부활되었고 부활의 배경은 전후 고조되고 있던 기계문명·인간소외 등의 이유에서였다.
쮜리히 Dada :
시위와 시낭송, 소음연주회, 미술 연주회, 저술 등을 통하여 서구 예술과 문학이 지니고 있던 전통과 편견을 공격한 선도자들이었다. 쮜리히에서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된 이러한 청년들과 스위스의 화가이자 디자이너로써 후에 아르프와 결혼한 소피토버 같은 여성들은 전쟁중 세계에 번지고 있던 병적인 흥분과 광기에 대한 오직 부정적이고 무 정부주의적이며 파괴적인 의미를 담은 형태로 표현했다. 다다이스트들은 부르조아자를 격분시키려는 시시한 욕망을 뛰어넘는 의도의 진지함 그리고 새로운 상상력과 내용에 대한 추구를 보여 주었다. 쮜리히 다다이스트들은 전 역사를 통하여 예술창조를 이끌어 왔던 전통, 전제, 규칙, 논리적 근거와 심지어 질서, 조화, 미개념들까지도 재 검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다이스트들은 이성과 논리가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불러 일으켰으며, 유일한 구원의 길은 정치적 무정부 상태, 본연의 감정, 직관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 등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다의 중요성은 하나의 양식이나 유파로서의 중요성이 아니라 정신상태로서의 중요성이었기 때문이다 쮜리히 다다이스크들은 일관성있는 한 그룹의 양식적 공통요소를 표현하는 예술상의 그 어떤 조직화된 강령이나 운동에도 열렬히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창조적 노력을 구체화하는 세가지 요소가 있었다. 이것들은 동시성, 우연성, 소음주의, 여기에서 소음주의는 소음음악회의 소음에서 유래한 소음음악을 의미한다. 소음주의는 미래주의로부터, 동시성은 큐비즘에서 미래주의를 경유하여 유래된 것이긴 하나 다다이스크들은 이 요소들을 부정적, 파괴적인 힘으로 생각하고 있다.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쮜리히 다다는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처음의 열정은 시들해 졌고 참여자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있었다.
1918년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쮜리히에 도착함으로서 뉴욕과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나고 있던 유사한 운동들과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피카비아는 전쟁이 끝나자 파리로 돌아와 전후 독일과 프랑스 다다이스트들을 연결하는 매개자가 되었다. 장아르프 : 알사스인인 장아르프는 쮜리히 다다가 배출한 중요한 미술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08년에서 1910년까지 스위스의 여러 작은 마을에서 사색을 하며 새월을 보냈다. 스위스의 풍경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준것처럼 여겨진다.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게 되었던 추상은 자연과 살아있는 유기체의 형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아르프는 자신의 예술적 방향을 정립하는데 유달리 긴 시간을 소모했다. 그는 큐비즘에 기초한 기하학적 추상을 실험하였고, 1915년 경에는 쮜리히에서 손길이 돌아가는 한 한껏 빨리 드로잉과 콜라주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그림들은 의미나 지적인 의도 없이 그 자체가 실체이다. 우리는 본성과 자발성이 완전히 자유롭게 반응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이 그림에서 평면의 배치와 비율, 색체등이 온통 우연에 의존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에 이 작품들이 자연처럼 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나에게 있어 우연이란 불가사의한 존재이유, 즉 그 전체성에 접근할 수 없는 어떤 질서중의 한정된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이 무렵에는 사물들과 생명 자체의 형이상학적 실재성, 즉 하등과 고등 동식물 모두에 속한 어떤 공통적 속성 같은것에 대한 작가의 확신도 나타나고 있었다. 아르프를 회화에서 콜라쥬, 부조, 환조 작업으로 이끌어간 것은 아마도 유기적 추상같은 혹은 유기적 응결같은 가능한한 구체적인 언어로 자신의 심재성을 표현하려던 정렬이었을 것이다.
수선화, 원색같은 형태의 유래는 직선적인 형태는 드물고 이따금씩 완만하게 곡선을 이룬것들 뿐이다. 이윤곽선들은 살아있는 유기체가 가진 불규칙성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유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프는 몇몇 다다 동료들 보다는 그룹의 발표활동에 덜 적극적이었지만 1916년과 1919년 사이에 나온 다다의 간행물에 계속 소묘와 시를 기고하는 한편, 자기 나름의 추상적인 유기체적 환상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아르프는 유기적 추상형태와 임의적, 비 묘사적 색채를 사용하여 가시적 세계 너머의 환상적 세계를 창조하는 또다른 분파의 선구자이다.
뉴욕 Dada :
제 1차 세계대전중의 뉴욕 다다는 우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뉴욕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 또는 대전 전부터 전위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19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展) 아모리 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마르샬 뒤샹과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뉴욕으로 와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전이적인 화랑에서 동지적 분위기를 발견했던 것이 바로 그 우연적인 사건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스티글리츠는 베를린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그가 열중한 최초의 대상인 사진을 발견하였다. 그 후 그는 순수예술로서의 사진을 개척한 선구자가 되었다. 쮜리히의 다다운동보다 연대적으로 앞선 필요할만한 사상이 뉴욕의 한 응집력이 있는 그룹속에서 독립적으로 발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유럽인 이외에 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은 미국작가 만레이와 모틴 샴바그, 그리고 미술품 수집가인 윌리 아렌스비그였다.
마르셀 뒤샹 ( Marcel Duchamp 1887.7.28 ~ 1968.10.2 ) :
프랑스 블랭빌 출생. 입체파 조각가 R.D.비용, 화가 J.비용의 아우이다.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면서 P.세잔의 영향을 받았고, 뒤이어 1911년에 큐비즘의 1파인 섹시옹 도르에 참가했다. 1911년 파리에서, 1912년 뉴욕의 애머리 쇼에서 동시성을 표시한 회화 《계단을 내리는 나체》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3년부터 다다의 선구로 보이는 반예술적 작품발표를 시작, 1915년 도미하자 이듬해 뉴욕에 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여 반예술운동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돌아와 쉬르리얼리즘에 협력, 1941년 A.브르통과 함께 뉴욕에서 쉬르리얼리즘전을 열었다. 뒤샹이 1915년 뉴욕에 도착했을 때 화가로써의 그의 이력은 사실상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큐비즘이 장식적 형식주의로 나아가는데 대한 환멸때문이었고 예술의 근본적인 유효성에 관하여 보다 큰 의문때문이었다. 뒤샹의 의문은 큐비즘의 단면화 작업과 동시성을 형식적인 목적보다도 표현적인 목적에 사용한 작품이다. 그들의 역동주의 '기계적 미감'은 새로운 기계적 세계나 즉 속도, 비상, 효율성과 또 이러한 말들로써 책정되는 진보 등에 대한 낙관적이고 비 해학적인 찬사였다. 뒤샹 작품의 원천은 다다와 초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미술보다는 문학작품이었다.
다다주의의 대표적 작가로 불리는 뒤샹이 변기에 어떤 손질도 하지 않고‘샘’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사건은 미술사에서 대단히 유명한 일화이다. 뒤샹의 이작품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데 우선 과연 미술작품이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을 품게하였다. 기성품인 변기를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 놓아도 그것이 작품으로 사람들에게받아들여진다면 과연 작품의 속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반문은 작품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술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시장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옴으로써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는 부조리한 상황과 마주치게 한다. 이들의 지독한 냉소주의와 신랄한 비판정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이 사실이다. 또 한 가지, 뒤샹의 작품은 더 이상 손으로 그리거나 직접 물건을 만드는 수공적인 작업에서 미술의 의미를 찾기는 어려워졌다는 충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뒤샹은 ‘샘’을 통해 화가란 아이디어를 다루는 사람이고 그 아이디어를 사람들에게제시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는 철학자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다다이스트들은 작품의 영구불변하고 기념비적인 특성보다는 작품이 대중들과 만나면서 생기는 교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성격이 강한 퍼포먼스나 이벤트를 자주 행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반예술을 표방하며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자 했던 이 다다이스트들의 작품이 대단히 값비싼 미술품으로 거래되고 있으니 이것 또한 현대미술사의 아이러니이다
르네상스 미술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 유럽을 풍미하며 정점에 이르렀던 미술 경향이다.
'재탄생'을 뜻하는 르네상스라는 말의 어원을 보면 고전 학문의 부활을 기술하기 위해 그 말을 사용한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슐레가 프랑스 역사의 한 절에 '르네상스'라는 제목을 붙이면서 르네상스가 특정한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통용되었다.
인간 정신의 회복을 바탕으로 신앙 위주의 미술에서 인간 위주의 미술로 변화하고자 했으며, 초자연적인 중세 미술에 반대하여 인간과 자연의 현세적인 아름다움을 긍정하는 사실적인 미술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 전반에 전성기였다. 동서 중개 무역에 의한 상공시민세력의 대두로 새로운 의식이 싹튼 것이 사상적 배경이다.
예술적으로는 의식적으로 고전적인 모범을 모방하려 하거나, 고전적 가치 기준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말한다. 이것은 고전 라틴 양식의 모방과 모든 고전적인 유물에 대한 무한한 찬양을 의미한다.
르네상스의 새로운 열광이 가져온 가장 본격적인 결과는 피렌체의 건축가 브르넬레스키가 보여준 새로운 유형의 건물이다. 그는 고딕 양식의 세부 조항을 떨쳐버리고 자신이 로마적이라고 생각한 건축물들을 본따 지었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가구기술을 채용하여 돔을 설계하고 조화있는 볼륨을 공간에 세우는데 성공했다.
고딕 건축의 수직적 상승성을 배제하고 조화를 이루면서도 장중한 공간을 살린 르네상스 건축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르네상스 건축을 대표하는 사람은 브라만테로 그가 설계한 건물들은 후에 '고전'으로 간주되었다.
브라만테의 설계의 웅장함은 그 양식과 규모에 있어 로마제국의 장엄함을 필적하고자 하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야심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는 캐피톨과 꼭대기의 둥근 지붕을 변형시켜, 성 베드로 사원 건물에 반영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고전적인 규범의 변형을 시도했다.
이러한 옛 양식은 맨 처음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곳인 왕실과 국제적인 상업 중심지에서부터 수용되기 시작하여 책이나 예술작품을 통해 전파되었고, 16세기 중기에는 북유럽 전역에서 고딕 양식에 대치되기 시작했다.
고전적 모범과 규칙에 의존하는 르네상스의 건축은 특성을 기술하기가 용이한 반면, 르네상스의 조각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조각에 르네상스의 취향이 반영된 것은 15세기 초, 도나텔로에 가서이다.
도나텔로는 고전적인 모티브를 모방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고대 작가들이 격찬했던 고전 조각의 정신을 부활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가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면서 젊어서부터 고전 작품과 경쟁 의식을 느끼며 규모가 큰 대리석 작품들을 많이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인 「다비드」「잠자는 큐피트」「바쿠스」「죽어가는 노예」등에서 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조각은 토리지아노, 첼리니같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의 여행으로 북유럽까지 전파되었다.
르네상스의 건축 양식은 고전적 원형을 참조함으로써 정의할 수 있고, 르네상스의 조각은 적어도 고대 유물들과 비교해 봄으로써 특징을 말할 수 있지만, 르네상스의 회화를 구성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규정하는 문제는 상당히 복잡하다. 르네상스 회화가 시작된 것은 이탈리아 회화가 처음으로 비잔틴 전통의 종교적 상징에서 탈피하면서부터라고 보는 것이 관례이다.
이 변화를 일으킨 사람이 지오토이다.
그를 필두로 15세기 후반 르네상스 회화에서는 고전 세계의 재창조 작업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고전적 주제의 그림이 많이 나왔으며, 그 한 예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한편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회화에 풍경을 배경으로 그려 넣어 화가가 재현한 장면의 분위기를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 화가로 지오반니를 들 수 있다. 우리에게 르네상스 성숙기로 알려진 이 시대의 특징은 정확하고 적절한 표현의 숙달과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재발견에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등 위대한 대가들의 시대인 이 때의 예술에서 지오토 이래 화가들이 추구해온 모든 이상이 실현된 것을 보았다.
완벽한 기법의 숙달로 회화에서는 이전 시대의 부자연스러움과 대조되는 편하고 우아한 조화를 낳게 되었다. 거친 윤곽은 레오나르도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모양에 의해 사라지고, 페루지노의 엄격한 대칭적 수법은 라파엘로의 균형잡힌 피라밋 형의 구도에 의해 사라지게 되었다.
알프스 북부의 회화는 르네상스와는 별개로 발달했으나, 소수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르네상스의 이상이 수용되기도 했다. 그 대표가 뒤러이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다시 태어난 예술을 독일 토양에 이식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라 생각하고 고전적인 미의 신비를 탐구하는 저술과 작품 제작을 하는 데에 전 생애를 바쳤다.
네덜란드에서는 고딕 전통이 강해서 르네상스의 수용이 늦어졌다. 영국과 프랑스는 엄격한 궁정풍의 이상을 추구하는 예술이어서 르네상스의 영향이 거의 없었다.
미래주의
미술에 국한된 것이 아닌 기존의 가치와 문화에 대한 혁신을 시도한 운동인 미래주의는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중심지 였던
파리가 아닌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운동.
미래주의는 1909년 2월 20일 시인 마리네티 (Filippo Tommaso Marinetti 1876~1944)가 Le Figaro」지에 「미래주의 선언
문」을 발표로 시작되었다. 그가 주장한 미래주의 예술이란 과거의 아카데미, 미술관, 도서관에서 벗어나 현대 사회의 특징
인 도시 생활에서 영감을 받고, 기계문명, 속력, 운동감을 찬양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20세기 초의 양식 보다는 이념을 먼저 내세웠던 이탈리아 전위 예술운동인 미래주의는 기계문명이 가져온 젊음, 기계, 운
동, 힘, 속도를 찬양하고 이를 새로운 미(美)로써 표현하려 애썼다.
전쟁을 세계의 유일한 위생수단 이라 말하였다, 1914~18년의 전쟁은 미래주의의 종말을 가져왔고, 미래주의의 대표적 작
가인 보치오니와 상텔리아는 전쟁 중 전사. 전후 남은 작가들은 보다 전통적인 양식과 태도로 옮겨갔으며, 1918년 이후 이
를 쇄신하려는 기도는 있었으나 큰 성과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미래주의의 영향은 여러 작가와 다양한 운동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특히, 다다와 러시아의 아방가드르 미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미래주의화가들
보치오니(Umberto Boccioni 1882~1916)
자코모 발라에게 회화 수업을 받았다. 초기에는 발라의 영향으로 산업화된 도시 풍경들을 분할주의 기법으로 그림. 1910년
경 회화에 일체주의(Unanimism)를 접목시키고 있으며, 이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의 표현보다는 집단의 의지나 운동감의
표현을 의미하고 있으며 대표작으로「대회랑의 폭동」,「일어나는 도시」등이 있다.
1912년 4월 11일 「미래주의 조각선언」을 발표. 상당수의 조각작품이 미래주의 회화에서와 똑같은 종류의 이질적인 대상들(머리, 창문, 광선)의 상호 침투를 많이 이용하였다. 「공간 속에서의 연속성의 특이한 형태」,「공간속에서의 병의 전개
」같은 작품은 대상의 구조에 내재한 에너지를 드러내고 대상을 주변공간 속으로 용해시키기 위해 형태를 열어서 드러내
보이려는 보다 근본적으로조각적인 시도를 보여줌.
카를로 카라(Carlo Carra 1881~1965)
입체주의 (분석적 & 종합적)에 가장 가까운 작가. 전쟁기간을 통하여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세계에 빠져 들면서 일종의
시적인 사실주의로 변해감.
「무정부주의자 갈리의 장례식」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1871~1958)
추상적인 경향을 띤 자각. 「가죽 끈에 목이 매인 개」는 19세기 말엽 머이브리지(Muybridge)와 그외 몇 사람의 운동에 관
한 사진 연구를 모방한 미래주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인다.
안토니아 산텔리아(Antonia Sant'Elia 1888~1916)
건축을 미래주의적 경지로 들어서게 함, 1914년 7월 11일 「미래주의 건축선언」을 발표. 새로운 패턴의 대도시를 제시, 과
거의 양식들을 참고하지 않았으며 신속한 수송 시대의 새로운 인구집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계 공학의 새로운 재료와
구조적 창안들에 맞추어 디자인하였다. 철근 콘크리트,철재, 유리들과 그 밖의 모든 목재, 벽돌 및 석재를 대신 하는 재료들
을 쓴 건축을 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자코모 발라 [칼새들의 비행]
바로크 미술
바로크 미술은 대략 1600년경부터 1750년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을 말한다.
'바로크'는 예술에 관한 문헌에서 역사적이며 비평적인 의미로 통용되는 언어로 그 어원은 불확실하다. 바로크가 '불규칙적' 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은 그 단어가 불규칙적한 진주라는 뜻의 포루투갈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인 듯 하다. 이 말은 부르크하르트와 뵐플린에 의해 미술사 및 비평 용어로 사용되면서 전문적인 용어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바로크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첫째, 미술사에서는 매너리즘과 로코코 사이, 즉 대략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의 양식을 말한다.
둘째, 특정한 양식에 대한 관념에 의해 특징짓는 일정 기간 - 보통 17세기를 말한다. 따라서 '바로크 시대, 바로크 정치, 바로크 과학'이라는 말이 있을 수 있다.
셋째, '바로크'라는 말은 지금은 과거의 경멸적인 의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아직도 예술에 관한 문헌과 비전문적인 의미의 일상어에서 '변덕스러운', '장식이 지나친', '현란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왕권의 번영과 함께 등장한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이다.
성당 건축과 함께 궁전 건축이 중심이었는데 베르사이유 궁전은 대표적인 예이다. 명암의 강한 대비를 이용하여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주제가 등장한 회화는 풍경화, 정물화, 세속적 인물화가 이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바로크 예술은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균형이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이었던 각각으로도 완벽한 부분들이 이루는 전체적인 균형과는 다른 것이지만 매너리즘의 종종 고의적으로 조화를 깨뜨리는 점이나 로코코의 신경질적인 단편성 보다는 오히려 르네상스에서 말하는 균형과 공동되는 점이 더 많다.
바로크가 추구하는 화합은 형식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신체적인 참여를 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정신적인 참여를 하게 하는 것이 바로크 작품의 특징이다.
바로크는 16세기 고전적 르네상스의 조화·균형·완결성등에 대해 경탄과 현혹을 지향하여 양감, 광채, 동감에 호소하고 있다.
그리하여 건축에서는 거대한 양식, 곡선의 활용, 자유롭고 유연한 접합부분등의 특색을 나타내고, 조각에서는 비상하는 동적인 자태와 다양한 의복의 표현등을 특색으로 하였다.
회화에 있어서는 대각선적인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등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바로크 회화의 선구자였던 카라밧지오는 측면 광선에 의한 명암의 강한 대비를 나타냈고, 주로 종교화를 그렸던 엘그레코는 「성모마리아의 승천」「십자가의 크리스트」를 그렸다.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벨라스케즈는 「왕녀 마가렛」「시녀들」을 그렸고, 풍만한 육체와 풍요로운 색채로 웅장한 구성과 생동하는 필력을 구사했던 루벤스도 유명하다.
집중적인 광선의 표현과 깊은 인간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던 렘브란트의 「야경」 「자화상」등은 바로크 미술의 절정이다.
그 외에 푸생, 반다이크, 할스, 베르메르등이 있다.
바로크 미술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첫째,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밧지오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
둘째, 전성기의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였다.
셋째,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과 코렛지오의 예술에서 이탈리아 바로크의 색깔과 빛, 풍요로움이 비롯된다.
이 세 요인으로 1620년대에 바로크 양식은 루벤스와 로마 화가들에 의해 최초로, 또 놀라운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로코코 미술
섬세하고 우아하며 여성적인 것이 특징인 로코코 미술은 루이 15세 시대의 특징적인 장식 예술 및 장식품들을 일컫는 용어이다.
로코코는 1700년경 프랑스에서 등장하여 18세기말 복고풍에 밀려 후퇴할 때까지 유럽을 휩쓸었다. 로코코라는 말은 '조약돌'을 뜻하는 프랑스어인 '로카이유'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단어는 루이 15세 치하의 상류 사회의 취향을 지칭하는 미술사가들의 은어이다. 처음에는 조롱의 뜻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나 요즈음에는 미술사가들에 의해 객관적인 의미에서 일정한 통일과 조화를 갖고 있는 예술적이고 장식적인 양식을 일컫는데 사용한다.
부서지기 쉬운 호화로운 장식, 사소한 주제, 목가적인 시, 규모는 작으나 정밀한 조각등이 쉽게 눈에 띄는 것이 로코코의 특징이다.
로코코는 바로크 미술이 즐겨 쓰던 부정형이나 유동적인 조형요소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바로크의 연장 또는 변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바로크가 지녔던 충만한 생동감이나 장중한 위압감 따위가 로코코에서는 세련미나 화려한 유희적 정조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바로크가 남성적, 의지적임에 반하여 로코코는 여성적, 감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로코코 건축의 최초의 작품은 로베르 드 코트의 베르사이유 궁전 예배당인데 메소니에, 보프랑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어서 오베르, 가브리엘 부자와 크루토느등이 활약하였고 보프랑이 만든 오테르 드 스비즈의 타원형 살롱, 가브리엘의 퐁텐블로궁의 회의실이나 베르사이유 궁전의 여러 홀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장식은 당시의 취미를 잘 전해주고 있다.
로코코 회화는 와토의 「시테르 섬으로의 탈출」에서 비롯된다. 그는 색과 선이 서로 융합되고 서로 연관되는 섬세, 우아한 작품을 보이면서 「공원의 연회」 등 품위있는 궁정 남녀의 유희등의 걸작을 보였다.
1730∼5년부터 로코코의 또 다른 국면이 시작된다. 훗날 회화적 장르라 불리는 이 때의 특징은 비대칭적인 장식의 사용이다.
피노가 실내 장식에서, 그리고 메소니에가 은공예에서 처음 시도했으며, 조각가인 몽돈과 퀴빌리에가 그 뒤를 이었다.
로코코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대표적인 화가들로는 와토와 부셰가 있다.
프랑스에서의 로코코의 퇴조는 신고전주의의 부활에 선행되어 일어났다.
18세기 중반, 코겡과 블롱댕은 '회화적 장르'의 극단적인 사치에서 돌아서 고전적 풍습의 모방이 아닌 이전 세기의 '좋은 취향'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세공인 베르벨크트, 조각가 루소의 영향아래 좀 더 보수적인 형태가 되면서 루이 15세기 통치 말기까지 급격한 단절없이 계속되었다.
로코코는 고대풍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새로운 취향의 고전주의가 출현함으로써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 혁명과 함께 새로운 시민 계급과 청교도적인 분위기가 대두되면서 전 세대의 예술과 도덕의 경박성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로코코는 파리에서부터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페인· 이탈리아 북부로 전파되어 각 나라의 특성이 가미되고 지역에 따라 많은 변형이 생겨나게 된다.
영국에서는 가구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로코코가 거의 유행되지 않았지만, 독일에서는 1720년경부터 약 50년간 로코코 양식이 건축계를 지배하였다. 다만 독일의 로코코 양식에는 바로크적인 장중미가 많이 남아 있어 그 결과 장중한 건축과 경쾌하고 화려한 내부 장식의 색다른 대조를 보였다.
사실주의 ( 寫實主義 Realism)
합리적 질서 위에서 대상을 명확히 표현하기 위해서 극단적인 형식화나 데포르마숑*을 행하지 않은 예술사조.대상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19세기의 사실주의가 흔히 낭만주의 및 이상주의와대립된 개념이었던 데 비해,20세기의 그것은 추상적이란 말과 대립된 개념으로 쓰이기도한다.
사실주의는 자연의 존중과 관찰이 그 주요한 과제였으므로, 이런 점에서는 자연주의 *와 엄밀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그러나 아무리 주관을 버리고 대상의엄격한 객관화를 추구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작가의 개성이 반영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리얼리스틱한 표현이라 해서 자연이라는 패턴의 단순한 반복만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주의는 각 시대, 각 작가에 따라서 독자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어졌다. 이를테면 구석기시대의 동굴의 벽화, 헬레니즘의 조각 ,반 아이크 형제 ,뒤러, 벨라스케스, 고야, 등의 작품에서 사실주의의 여러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역사적 유파로서의 사실주의는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낭만주의 * 및 이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유럽에 확산되었는데, 그발생에는 부르좌 의 대두, 과학의발전, 기독교의 권위 추락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미에(석판화의 창시자)의 시니컬한 사실주의는 쿠르베의 이상화 및 공상화를 배제함으로써 사실주의의 정점을 이루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변질되어 이념과 기법이라는 양극으로 분열된다. 19세기 후반에 발명된 사진이란 새로운 기술의 급속한 보급으로사실주의가 추구해 온 대상 객관적이고 엄밀한 재현은 더 이상 예술가들에게 매력을 더 이상 주지 못했던 것이다 .
야수파 野獸派
Fauvisme(불)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신적인 회화 운동으로 수년 간 유사한 테크닉에 관심을 보였던 화가들에 의해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미술운동.이운동은 순수 색채의 고양에 주력했다. 이 새로운 화법은 1899년, 그룹에서 항상 주도적 인물이었던 마티스에 의해 시작 되었다.
야수파라는 명칭은 당시의 비평가 루이 복셀 Louis Vauxcelles이 1905년 가을 '살롱 도톤느'에 출품되었던 마르케의 15세기풍의 청동 조각을 가리켜 '마치 야수가 우리속에 갇혀있는 도나텔로 같다.'고 평한데서 유래되었다.이 운동의 동인은 귀스타프 모로의 문화생이었던 마티스,마르케,루오,앙리 샤를르망갱,샤를르 카무앵 그리고 장 퓌이 등과 '샤토'로부터 블라맹크와 앙드레 드랭,그리고 '르 아브르'로부터 뒤늦게 들어온 프리츠.브라크,뒤피의 세 주요 그룹이 융화된 것이며,이에 네덜란드 화가 반 동겐도 참여 하였다.그 작품들의 특징은 강렬한 순수 색채에 있었으며,그 색채는 때로는 세잔느처럼 공간 구성에도 사용됐지만 대부분 감정 및 장식적 효과를 위해 임의적으로 사용했다. 이 운동은 1905년~1906년살롱 데 앵데팡당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야수파란 대부분의 동인들에게 서로 다른 양식의 발전 단계에서 거쳐갔던 일시적 단계에 불과했고 1908년 이들은 각자의 방향으로 독자적으로 전개되며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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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살롱·도톤느(Salon d'automne)의 한 방을 원색투성이의 요란한 색채, 분방한 터치의 작품들로 채운 한 무리의 젊은 화가들이 있었다. 이런 것들을 보고, 이 방의 중앙에 전통적인 작풍의 조각이 두어져 있는 것과 비교해서 마치 [야수들(포브 Fauves)에 둘리운 도나텔로]라는 야유를 했던 비평가 보크셀의 말을 따서 그냥 [포브] 및 [포비즘]이라고 불렀다.
이 화가들은 국립미술학교의 모로(Gustave Moreau)교실에서 배운 마티스(Henri Matisse), 마르케(Alrgert Marquet), 망갱(Henri Manguin), 카므왕(Charles Camoin) 등이며, 나중에 곧 이들을 따른 쥘·플랑드랭(Jules Flandrin, 1871∼1968), 세느강변의 한 샤투에 공동으로 제작실을 갖고 있었던 드랭(Andr Derain)과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등이다.그 후에 이들은 다시 장·퓌이(Jean Puy, 1877), 방·동갱(Kees van Dongen, 1877∼1968), 그리고 모두가 르·아브르의 출신인 3인의 화가 프리에스(Othon Friesz), 뒤피(Raoul Dufy)와 브라크(George Braque)가 참가한다. 이들은 마티스와 더불어 베르트·외일화랑에서 전람회를 가졌으며 나중에는 앵데팡당전에서 젊은 주류로 부각하게 된다. 그러나 포비즘은 어떤 특정한 이론적 주장아래 전개된 운동이라기 보다는 이와 같은 교우관계에서 오히려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운동이었다.
색채에 대한 정열을 서로의 공통점으로 하고 있었으며, 그 정열은 무엇보다도 재현적 역할로부터 색채를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야수]에 비유될 정도로 격렬한 색채표현을 했던 것도 이런 정열이었는데 인상주의, 신인상주의가 고유색을 해체하며 색채의 밝음을 이룩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광선의 리얼리스틱한 추구의 결과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포비즘이 생겨 나오기 위해서는 이시각적 리얼리즘이 부정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이 그런 것을 배웠던 것은 특히 고흐와 고갱에게서부터 이다. 고흐는 주관의 표현을 위해서 색채가 자유로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따라서 포비즘은 표현주의적인 경향과 함께 조형적, 장식적 성격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2면성은 블라맹크와 마티스라고 하는 가장 대립적인 개성의 대조에 의해 상징되어짐과 동시에, 크고 작고 간에 모든 포비스트들 속에서 볼 수가 있다고 하기보다는 그것들이 색채에의 정열 때문에 아직도 미분화된 상태에서 성립하였던 것이 포비즘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만큼 색채에 대한 정열이 포화점에 도달한 때에 포비즘은 자연히 해체되었다. 사실 마티스가 {화가의 노트}를 써서 포비즘을 그 나름대로 이론화할려고 한 1908년에는, 벌써 모든 포비스트들이 색채를 버리고 보다 뚜렷한 구축성을 구하기 시작한다. 그 중에서도 포비즘에 참가하는 것이 가장 늦었던 브라크는 1907년에 누구보다도 먼저 새로운 방향에의 모색을 시작하여 나중에 입체주의에 도달한다. 드랭도 한 대는 입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아들인 후에 고전주의적인 외화에로 돌아 갔다.
포브 중에서는 가장 야수적인 블라맹크마저도 입체주의에 접근한 대는 없었지만 색채를 버려서 세잔풍의 엄한 구성을 보이게 한다.그 후 그의 화면에는 다시 격렬한 정열이 되살아 났으나 밝은 색채를 다시 볼 수는 없었다. 결국 포브들 중에서 마지막 까지 색채에 충실하였던 것은 세련된 색채와 경묘한 묘선(描線)으로 밝고 멋있는 세계를 이룩하여 갔던 뒤피와
마티스뿐이었다.
조르주 루오 [늙은 왕]
오리엔탈리즘
서양 예술가의 동양권에 대한 관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루어져 왔다. 오리엔탈은 넓은 뜻에서 서양에 대한 동양의 개념으로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도 포함된 아시아권 을지칭한다.
8C경 SILK ROAD를 통한 중국의 비단, 도자기의 유입은 유럽인들에게 동양에 대한 관심과 환상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17~ 18C에는 중국적 취미가 대중화 되고 18C에는 터키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였다.
몽테스키에의 <페르시아인의 편지>, 모짜르트 <후궁으로부터의 도피> 등의 작품을 통해 동양에 대한 환상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오리엔탈리즘이 구체적으로 문제화 되고 표면적으로 나오기 시작한 시기는 19C였다.. 프랑스는 대혁명 후 1798~1892년의 이집트 원정, 1830녕의 마로크와 알제리 점령은 주변 여러 국가들의 국가주의를 자극시키고 동서양의 접경지대인 터키는 정치적으로 유럽 국가들에 대응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그리스의 독립운동을 진압하지 못하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신고전주의 사상의 팽배로 고대를 예찬하여 그리스의 고대문화와 문화의 발상지에 대한 동경의 풍조가 확산되면서 그리스는 터키에 대하여 1821년에 독립선언을 하였고, 패권을 둘러싸고 이해관계에 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무력으로 터키를 제압, 1829년에 그리스의 자주성을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 1832년에 그리스 독립이 인정되었
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르와의 1824년 <키오스섬의 학살>은 그리스의 독립과정에 일어난 일을 표현해낸 그림으로 동양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 들라크르와는 터키와 북아프리카를 여행하였는데 뜨거운 태양에서 빛과 색치를 발견하였고, 이국적 문화는 낭만주의 경향의 작품의 주요한 주제가 되기도 한다. 또한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 화가인 앵그르의 그림에서도 터키 풍물, 술탄의 궁정 하렘과 대오달리스크(터어키의 후궁)를 소재로 여러 점의 관능적 표현의 누드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 사상의 화가이건 당시 작품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기 보다는 상상의 세계에서 신비화된 동양의 표현일 뿐이다. 당시의 역사에 근거한 터키의 현실이나 민중의 생활이 아닌, 터키의 현실과는 무관한 상상으로 신비화된 허구일 뿐이다.
--박 남희 , 19세기 프랑스 회화에 나타난 동양성에 관한 연구에서 발췌
앵그로[오달리스크와노예]
인상주의 印象主義 Impressionisme(불)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일어난 회화운동.인상주의는 단일한 이념이나 명백한 원리를 갖는 유파라기는 거의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었다.최초의 중심인물은 모네,르노아르, 시슬리,바질 등으로 이들은 마르크 글레이르의 제자들이었으나, 1863년 마네의 전시회이후 아카데믹한 교습에 불만을 갖고,피사로, 세잔느, 모리조,기요맹과 친교를 맺고 몽마르트의 카페 등에서 정기적으로 모였다.
1874년 4월, 사진작가 나다르 Nadar의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앙데팡당*전시회를 개최하는데, 이를 자칭 '무명화가 및 조각가 판화가 예술가 협회전 " 이라고 불렀다.그런데 출품작 중 모네의 <해돋이 인상>를 인용하여,'인상주의자'라고 조소적인 의미로 명명한 것이 후에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술가의 정서 상태보다도 오히려 자연 혹은 삶의 편린들을 가능한한 객관적이며 과학적인 정신에 의해 기록함을 예술의 제일의 목적으로 삼는 사실주의* 의태도에 동조했다. 이 운동은 19세기 후반에 널리 보급되었던 과학적 사실주의의 한 일환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들의 에술관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과는 달리, 사회의 개혁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마네는 18세기 전통적 주제들을 사실적으로 변형시켰고,르노아르는 귀여운 여인이나 아이들 ,아름다운 풍경들을, 드가는 경마,무희, 세탁부,재봉사들을,시슬리, 피사로, 모네는 주로 풍경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형태 구성을 피하고,마치 카메라가 우연히 한 장면을 찍은 것 처럼 즉각적인 시각적 인상의 효과를 전달하려고 했다.그렇지만 우연성의 인상은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으로서 예컨대 드가는 현장에서의 스케치를 자신의 작업실에 와서야 비로소 그림으로 구성했다.
마네는 1870년 이후에야 외광파*로 전환했다.르로와르 의 방향전환은 검은 음영과 윤곽선을 배제하고 '색채분활기법' 혹은 점묘법*등을 도입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풍경화는 이제 망막의 실제이미지를 재생하고 밝은 광선에 비친 생생한 장면의 등가물을 그림물감으로 재창조하는 행위가 되었다. 음영은 회색이나검은색이 아니라 대상의 보색으로 칠해지고,윤곽선을 배제함에 따라 대상의 입채성이 상실 되며, 따라서 인상주의 회화는 빛과 대기의 회화, 지시색과 반사색의 유희로 되었다.
입체주의
개요
입체주의는 1907~1914까지 파리에서 피카소와 브라크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미술혁신운동이다.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발표함으로써 전개되었던 이 운동은 대체적으로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세잔적 입체주의:1907~09, 분석적 입체주의1910~11, 종합적 입체주의:1912~14)
"자연을 원추,원통,구에 따라 취급한다"는 세잔의 말이 바로 입체파의 계시가 되었으며 그의 미술과 아프리카 흑인조각은 이 운동의 초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입체파는 르네상스 이후에 나타난 서양회화의 전통적인 원근법과 명암법, 인상주의의 순간적인 현실묘사를 지양하고, 자연의 여러가지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형상으로 환원, 시점을 복수화하여 사물의 형태를 2차원의 회화 평면속에서 구축적으로 재현시키고자 노력했다.
파피에 꼴레의 수법을 채용하고 되고, 이것을 과도기로 입체파 운동은 후기로 들어간다.
여기에는 풍부한 색채가 새롭게 부활되어 기하학적인 색면과 결합된다. 피카소, 브라크와 더불어 후앙 그리가 이 시기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의 운동은 1차대전의 발발로 종말을 맞았으나 그 성과는 그 후의 여러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색체와 다이나믹한 율동을 도입했던 레제와 들로네의 오르피즘과 기계의 속도미를 표현하고자 했던 이탈리아의 미래주의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입체주의의 전개: 피카소와 브라크를 중심으로 전개됨.
입체주의(큐비즘)는 1907~1914까지 파리에서 피카소와 브라크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미술 운동이다. 큐비즘이란 명칭은 1908년 마티스가 브라크의 작품(에스타크 풍경 연작)을 보고서 '작은 입방체(큐브)를 쌓아놓은 것 같다'고 말한 것을 평론가 루이 복셀이 (질 블라스 신문에) “대담한 청년 브라크는 모든 것을 입방체로 그려낸다”고 기사함으로써 공식화되었다. 이후, 이 용어는 프랑스의 문인 아뽈리네르에 의해(『미학적 명상,입체주의 화가들』,1912) 이론적으로 다루어지고 여러 나라에 퍼뜨러진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아뽈리네르의 입체파 해석은 최근들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과학적/순수색채적/물리적/본능적 큐비즘으로 나눈 그의 자의적 구분(오병욱)과 입체파 미술의 주요 특징
-꼴라쥬와 오브제의 도입, 동시성의 출현의 중요성- 을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 (임영방) 등이 그것들이다.)
1) 초기(세잔적) 입체주의: 1907~1909
입체주의 최초의 작품은 1907년에 제작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으로 보통 평가된다. (피카소는 이 그림제작 이전에 이른바 청색시대 -굶주림과 노동, 가난이 주제- 와 장비빛 시대의 활동시기를 맞이하고 그리고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미술에도 당한 관심을 보인다). 이 <아비뇽의 아가씨들>에는 바로 아프리카 조각의 특징(인물의 얼굴표현)이 엿보이며, 세잔의 특징(대상을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로 환원함, 수욕도의 주제와 구도)과, 분석적 큐비즘 미술의 단초(복수시점과 촉각적 평면의 구성)가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2) 분석적 입체주의: 1910중반~1911(1912)
이 시기에 그려진 피카소와 브라크의 일련의 정물화와 초상화 속에서 보여지듯이, 이제 화면은 (자연스러운 외관과 철두철미하게 단절된 채) 짧은 수평선과 수직선들이 주된 조형요소로 등장하고, 여기에 약간의 사선과 곡선으로 된 변화가 주어지는 평면회화가 되기에 이른다. 이들은 이러한 분석적 방법으로 인해, 개인적인 해석이나 감성이 개입되지 않은 채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3) 종합적 입체주의: 1912~1914
현실복귀의 노력은 다음과 같은 조형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①우선, 대상물의 단순화/기호화를 들 수 있다. 이전의 시기에서 정물대상들은 분석적으로 해체되었는데 이제 이러한 사물들은 그것의 실체성 회복을 위해 단순화, 기호화된다(삼각형의 포도주잔, 직사각형의 물컵, 원주모양의 촛대, 바이올린의 S자형 곡선 등).
②또한 대상물의 암시적 재현을 위해 인쇄활자체의 도입된다. 즛, "스탠실 문자들이 실재를 위한 시금석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악가의 이름, 곡명은 음악의 주제와 관련된 현실을 암시하고 <BAR>라는 글자는 물병과 잔, 놀이용 카드들의 배치 위한 분위기/장소의 재현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다
파블로 피카소1907
[아비뇽의 아가씨들]
중세 미술
초기 기독교,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미술 등 14세기까지 서양의 화가들은 대부분 예수나 성인의 일생과 같은 기독교적인 주제를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종교화를 더욱 성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화가들은 풍부한 색채와 금도금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는데, 오늘날에는 단조롭게 보일지도 모를 이들 그림들이 중세인들에게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중세 시대는 다른 여러 시대하고는 달리 이질적이고 특색있는 미술을 만들어 전개하였다.
그 특색은 당시의 미술이 모든 의미에 있어 기독교 미술이었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세 이후에 있어서도 기독교 미술은 풍부한 전개를 다 하고 있다.
중세의 예술가들은 신앙과 교리란 틀 안에 있으면서 신의 지배와 교회의 권위 아래서 작품을 제작하였다. 예술적 개성은 종교적 권위의 규범과 제약 아래서만 성립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중세 예술의 대부분은 '무명의 예술가'들의 작품이며, 때로는 집단적인 협동 제작이었다. 그들 위에 있는 것은 교회이며 교리이며 또 민중의 신앙이었다.
이와 같은 기독교 미술로서의 조건이 중세미술과 기타의 여러 성격을 대부분 규정짓는 것이었다 해도 무방하다.
초기 기독교 미술
서양의 미술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스·로마 미술은 인간 중심의 미술이었으나 중세는 기독교 중심의 미술이었다.
지하묘굴의 프레스코 벽화로 대표되는 카타콤 미술은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의 미술로 초기 기독교 미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에는 초기 교회 양식으로 로마의 바실리카를 모방한 바실리카 양식이 주된 흐름이 된다.
중세 유럽의 대부분의 미술이 기독교 미술이지만, 초기 기독교 미술은 그 중에서도 주로 이탈리아나 지중해 서쪽 지역의 미술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이 시기의 동유럽은 이른바 비잔틴 미술과 새로 유입된 게르만 족의 투박한 미술이 유행하였다. 물론 동·서 유럽 미술의 경계가 명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중복은 불가피하다.
기독교 미술은 도상적 관념들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고대 고전기의 우상 숭배적인 양식과 예술 언어를 받아들였다. 기독교의 정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전기의 미술이 채택되었지만 그것은 미의 이념이라든지 시각적 아름다움, 또는 기술적 완전성 따위보다도 상징적 의의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미술 양식은 나타나지 않은 반면 새로운 도상학이 나타났다. 요컨대 초기 기독교 미술은 고전 후기와 비교해서 양식상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기교상으로는 보다 저급하며, 도상학적으로는 아주 새로운 것이다.
초기 기독교 미술 중에서도 특히 회화의 경우, 그 예를 카타콤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좁은 카타콤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들이 당시 회화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기독교의 상징주의에 입각하여 그림의 모티브가 신중하게 선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양치기, 하늘의 연회, 불멸성을 상징하는 수탉, 영혼을 의미하는 비둘기, 희망을 상징하는 닻등이 종종 쓰이고 있으며,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나의 이야기 등이 구원의 전형으로서 그려지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기적 장면들을 묘사하는 경향은 점점 일반화되었고, 이 시기의 그리스도는 주로 수염이 없는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건축에는 바실리카라고 불리는 커다란 교회당이 나타난다.
이 건축들은 서유럽 교회당 건축의 기본적인 모델이 되었지만 불행히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는 집회당과 신전과 사저의 종합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시 교회 건물의 구성 요소 중 특징적인 것으로서 모자이크가 있는데, 이것은 소박하고 단순한 건물의 외경과는 달리 그 찬란한 광채로서 신의 영적인 위엄을 환기시키는 장엄한 세계를 연출해냈다.
조각은 회화나 건축에 비해 보수적인 것이었는데 기본적으로 우상 숭배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등신대의 인물상이나 대형 예배당의 제작을 꺼렸던 당시 상황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 조각은 반모뉴멘탈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그리스·로마 조각의 공간의 깊숙함이나 당당한 규모가 없어지고 소규모의 형태와 레이스 같은 장식으로 기울어졌다.
비잔틴 미술과 로마네스크 미술
비잔틴 미술은 동로마 미술로 동서 절충 양식으로 대표된다.
즉 동방 미술과 헬레니즘 미술을 혼합시킨 것이다. 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정한 후 미술의 중심은 점차 동방으로 옮겨졌고 약 1 천년에 걸쳐서 서양과 동양 미술이 융합된 문화를 이루었다.
비잔틴 건축의 양식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바실리카 형식과 동방의 전통적인 팔각당 또는 원당 형식의 두 종류가 있다.
소아시아 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바실리카 양식에서 집중형 돔형식으로 변화되고 돔에는 모자이크 벽화가 그려졌다.
그리스도나 성모를 판자 위에 예배의 대상으로 그린 이콘, 즉 성상화가 그려졌는데 대표적인 건축으로 성 소피아 성당, 모자이크로 유명한 성 비탈레 성당, 성 마르코 성당등이 있다. 이 중 성 소피아 성당은 거대한 돔과 눈부신 모자이크와 금·은으로 장식된 화려한 건축이다. 환조가 쇠퇴하고 장식 부조와 모자이크, 성화상이 성행하였다.
서로마를 계승한 서유럽의 미술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로마네스크 미술은 형성되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은 게르만 민족의 향토적 전통 위에 고대 로마 양식을 받아들여 이루어진 미술로 서로마를 중심으로 발달한 미술이다. 두터운 벽과 아아치형 천장, 작은 창문, 수평적 장중함을 가진 건축 양식이 대표적이며 프레스코 벽화형식의 회화가 그려졌다.
전체적으로 무겁고 어두운 느낌을 준다. 성서, 종교서의 수사본 삽화인 미니어처가 발달한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피사 성당과 성 마들렌 성당이 있다. 조각은 이들 건축물을 장식하는 부조가 대부분인데 감각적인 사실성을 피하고 동방의 영향을 기초로 한 풍부한 환상과 상징, 생명감과 신앙에 젖은 소박한 것을 나타내었다.
고딕 미술
로마네스크 미술에 이어 12세기 중기부터 르네상스 미술의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 전역에 전개된 중세 기독교 미술의 발전 단계 및 그 일반적인 양식을 의미한다.
영국 골통품 애호가들이 중세 기념물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초기의 경멸적인 의미에서 벗어났다.
'고딕'이란 용어는 건축에서 특히 성당 건축에서 그 평가를 받게 되지만, 거기에 함께 형성된 장식, 조각, 회화, 공예에 이르기까지 총괄적으로 확산되어 적용되었다.
고딕 미술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기독교 미술의 절정기의 양식이다.
높은 건물과 첨탑, 첨두 아아치로 수직적 상승감을 나타내는 건물 양식이 대표적이다. 또 건물에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 글래스도 특징할 만하다. 대표적인 고딕 성당으로 아미앵 성당, 스테인드 글래스로 유명한 샤르트르 성당, 노트르담 성당, 랭스 성당, 퀼른 성당,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대표적이다.
1140년에 세운 생 드니사원의 예배당과 성가대석은 최초의 순수한 고딕 건물로 추정된다.
그 외의 순수한 고딕 건물로는 1163년에 시작된 파리의 노트르담과 브르주, 라용 등이 있다.
생 드니는 고딕 성당의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서쪽 정면은 장미창이, 서쪽 현관에는 신학의 교과 과정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아미엥 역시 순수한 고딕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기둥은 네 부분으로 된 궁륭의 리브들과 연결되고 성가대석 주위의 회랑은 측랑과 이어지며 세 개의 입구가 있는 서쪽 정면은 네이브와 측랑의 윤곽을 반영한다.
영국에서 이러한 양상은 캔터베리 성당 성가대석에서 보여진다.
13세기초의 고딕 양식은 큰 교회당 양식을 중단하고 수도원 건축, 지역교구교회, 가정 건축에서 사용되는 요소들을 채택함으로써 국가별, 지역별로 다양해졌다.
건축은 고딕시대를 결정짓는 대표물로서 1140년부터 16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전형적인 고딕 조각의 발전은 렝스와 방베르 성당 조각들과 함께 13세기초에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다. 그 작품들은 고전적인 균형과 자연적인 것에 대한 충실함으로 특징 짓는데, 여기에서 로마네스크 건축 조각의 육중한 엄격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기념비적이고 영웅적인 것으로부터 복잡하고 친밀한 것으로 발전하는데 비례는 과장되고, 감정은 강조되며, 콜로뉴 대성당 성가대석의 사도 인물상에서처럼 주름장식이 인체를 감싼다.
고딕 건축의 시초로 보는 12세기에 회화 범위는 제한되어 있었다. 사실상 벽 공간이 점차로 제거된 것은 회화를 위한 공간이 없는데서 연유한다. 그 대신 스테인드 글래스 창문이 디자인과 색채계를 표현하였다. 고전적인 주름, 고딕적 흔들림과 같은 필사본의 서정적 세련성등은 전형적이고 새로운 특징으로 간주된다. 하인리히 폰 펠텍케의 「에나이트」, 브누아 드 쌩모아레의 「트로이 로맨스」등을 들 수 있다. 또 14세기에 둣치오의 「시에나성당 마에스타」에서 패널화가 일반화되었다.
14세기초 지오토로 시작하여 15세기말 로지에 반데르 바이덴이나 보티첼리로 회화의 발전은 집약되고 그 특징은 양식화, 선적인 특질, 고딕식 흔들림이라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 超現實主義 Surrealisme(불)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 발 발 직후까지 약20년동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해서일어났던 전위적인 문학 .예술운동 .다다이즘*과 미래주의*등 20세기에 등장한 다른 전 위운동에 비해 양차 세계대전 동안 가장 폭넓게 확산되었으며 논쟁 적인 예술운동이 되었다. 초현실주의는 근본적으로 경험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애썼으며, 현 실을 본능적이고 잠재적인 꿈의 경험과 융합시켜서 논리적이며 실 재하는 현실, 그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시키려 했던 바 이것은 절대적 혹은 초월적인 현실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술사에서 이운동을 예시한 미술가들은 보쉬, 아르침볼도, 고야, 롭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르동, 키리코 등으로 환상적이면서도 기이한 면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보였다. 이들과 비슷한 특징 때문 에 샤걀 또한 이 운동의 선두주자로 언급된다. 이들은 무의식이 프 로이트의 이성의 통제를 뛰어넘어 잠재된 충동과 상상의 세계를 해 방시킨다는 학설을 원용하여 자동기술법*에의한 다양한 기법을 개 발했다.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자동기술적인 글을 썼고,미로, 아르프, 마송, 에른스트 같은 화가들은 프로타주*와 꿈의 현실적 재생산 사이를 넘 나드는 기법을 통해 시각적인 등가물을 창출하려고 했다. 그러나회화와 조각의 복잡한 기법들은 순수한 자동기술법*으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최소한 어느정도의 의식적인 작업을 필요로 한 다. 따라서 '발견된 오브제'*와 꿈이 강조되는 것이다. 초현실주의 회화의 가장 특징적인 면은 과거에 꿈을 그린 그림들과 다르다는 점이다. 즉, 꿈의 공간의 단순한 재생산과, 논리적으로 서 로 상관이 없는 대상들을 암시적으로 병치해 꿈의 특정한 감성적 특 질을 전달하는 것과의 차이점이다.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은 비기능 적이거나 전혀 기능성이 없으면서도 정교하게 구성된 물체처럼 보 이도록 하기 위해서 대상(물체)을 그들의 규범적인 대(臺)에서 끌어 내려 진열함으로써 다다이스트인 뒤샹과 피카비아의 방법을 이어받 고있다
살바도르 달리 [욕망의 수용] 1929.패널에 유채 34.9*21.9
팝 아트 Pop Art(영)
1960년대 초기에 미국에서 발달하여 미국 화단을 지배했던 구상 회화의 한 경향.'팝 Pop'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포플러 popular' 의 약자로 보는 것이 유력하다.즉 통속적인 이미지, 다시 말해서 일상 생활에 범람하는 기성의 이미지에서 제재(題材)를 취했던 이 경향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팝 아트가 급속히 일반화된 것은 1962년 뉴욕의 '뉴 리얼리스트전' 이후의 일이나,영국에서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그 전조가 된 예술 활동이 있어왔다.영국의 팝 아트는 발생초기부터 사회 비판의 의도를 뚜렷이 갖고 있었다. 이 운동은 구태의연한 사회 질서에 대한 비판으로서 사회와 예술을 접목시키고자 했던 젊은 작가들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따라서 알로웨이가 영국에 있어서의 '대중문화'라고 말한 것은 미국과는 다른, 문화적 계급을 의식한 것이었다.
미국의 팝 아트는 1950년 초기의 '추상 표현주의'*의 애매하고 환영적(幻影的)인 형태와 주관적인 미학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미국으로 상징되는 현대의 테크놀로지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를 기조로 하고 있다. 미국 팝 아트의 선배 작가로는 로버트 라우센버그와 제스퍼 존스를 들 수 있다. 특히 라우센버그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물체, 이를테면 코카콜라병, 자동차의 타이어, 침대등을 이용하여 컴바인 페인팅 *을 창안해냄으로써 팝 아트가 성립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미국의 팝 아트는 흔히 발견되는 일상의 이미지나 물체를 미술 작품으로 전환 시킨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상적으로 흘러 넘치는 영상 또는 물체를 이용한다는 것 자체는 반(反) 미학적이고, 다다적인 사고방식이다. 다다이즘*과 기본적으로 다른 것은 팝 아트가 세련된 고도의 기술에 의해 '일상'을 미술의 영역으로 또는 사회의 체계 속으로 끌어 들였다는 점에 있다.작가로는 특히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스타인 , 클래스 올덴버그,등은 사회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를테면 마를린 몬로의 얼굴,미키 마우스의 이미지, 세븐 업의 트레이드마크, 그리고 디크트레이시의 연속 만화따위 -을 작품 속에 도입함으로써 기호체계와 그들 자신의 테마를 겹쳐서 표현하고 있다.
앤디 워홀 [녹색 코카콜라병]
포스터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은 지난 20세기에 걸쳐 서구의 문화와 예술, 삶과 사고를 지배해온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6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기 모더니즘은 하나의 통일된 사조나 운동은 아니지만, 그 중심적 동기는 모더니즘을 통해 수립된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엄격한 구분, 예술의 각 장르간의 폐쇄성에 대한 반발이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것은 건축 비평가들이었는데 이는 1960년대까지 유행하던 엄격한 사각형 형태의 양식에 대한 반발로 나온 건축물에 대해 쓴 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포스트 모던'적 경향이 분화되지 않은 과거의 예술을 소생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시대, 다른 문화로부터 양식과 이미지를 차용하는 예술은 모두 '포스트 모던'의 자격을 얻는다.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들은 작품의 유기적 통일성을 부정한다. 그들은 통일성이나 일관성보다는 오히려 편리성이나 임의성 또는 유희성을 더욱 설득력 있는 예술적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작품은 '잘 빚어진 항아리'가 아니라 오히려 '산산조각으로 깨어진 항아리'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억압된 거들의 복귀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매우 적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동안 가부장적인 모더니즘의 권위 아래에서 주변적인 위치밖에는 차지하지 못하면서 억압되었거나 무시되어 온 것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인정 받으면서 부상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무엇보다도 주변적인 것들의 부상이라는 점으로 특징 지을 수 있다.
기성 문화에 반기를 드는 청년 문화를 비롯한 반 문화, 고답적이고 엘리트적인 고급 문화에 대항하는 대중문화, 제1 세계나 제2 세계의 문학에 도전하는 제3 세계의 문학,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에 항거하는 페미니즘 문학 등이 바로 그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모두 탈중심화 脫中心化 나 탈정전화脫正典化 현상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한마디로 말해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논리적인 연장이며 계승인 동시에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며 단절이다.
한편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은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을 포함한 모더니즘의 기본 원리를 논리적으로 계승하여 극단적으로 발전 시킨다.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모더니즘에서 발견되거나, 또는 그동안 모더니즘에서 거의 무시되거나 소홀히 간주되어 오다시피 한 것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핵심적인 지배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모더니즘에서는 핵심적인 지배소로서 기능을 담당해 온 것들이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주변적인 위치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그 핵심적인 지배소로서는 네 가지가 있는데, *상호 텍스트성 *탈 장르화 혹은 장르 확산 *자기 반영성 *대중 문화에 대한 관심등이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그동안 장르와 장르 사이의 '경계선을 넘는' 작업에 큰 관심을 보여 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간격을 좁히는' 작업에도 적지않은 관심을 보여 왔다. 사실상 포스트 모더니즘이 처음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대중 문화와의 관련성에서 였으며, 지금까지도 그것은 여전히 대중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모더니즘과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점 중의 하나는 고급 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에 놓여 있던 커다란 장벽을 허물어 버렸다는 데에 있다. 힐튼 크레머가 말하는 이른바 '속물들의 복수' 현상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억압된 것의 복귀' 현상은 문화 영역의 경우 그 동안 무시되어 왔거나 소홀히 취급받아 온 장르들이 새롭게 가치를 인정받는 데서 가장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 일부 특권층만을 위한 난해한 엘리트 예술보다는 더욱 대중적인 팝 아트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이고 문학에서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한마디로 점잖은 전통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며, 가식적이지 않은 인간성에의 희구이며, 자연인 인간의 모습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의 운동이다.
포스트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또 다른 주된 특징은 모더니즘적 문화와 사고 방식이 세워놓은 엄격한 지배의 틀을 거부하는데 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소통이 불가능한 정치, 문화, 전문화의 영역을 깨뜨리고, 삶과 문화의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예술에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끌여 들여 비판적으로 다룬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알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서구에서 근대 혹은 모던(modern) 시대라고 하면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시작된 이성중심주의 시대를 일컫는다. 종교나 외적인 힘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던 계몽사상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도전 받기 시작하였다. 니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거친 후 포스트모던 시대는 J.데리다, M.푸고, J.라컨, J.리오타르에 이르러 시작된다. 니체와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계몽주의 이후 서구의 합리주의를 되돌아보며 하나의 논리가 서기 위해 어떻게 반대논리를 억압해왔는지 드러낸다.
'데리다' 는 어떻게 말하기가 글쓰기를 억압했고, 이성이 감성을, 백인이 흑인을, 남성이 여성을 억압했는지 이분법을 해체시켜 보여주었다. 푸고는 지식이 권력에 저항해왔다는 계몽주의 이후 발전논리의 허상을 보여주고 지식과 권력은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고 말하였다. 둘 다 인간에 내재된 본능으로 권력은 위에서의 억압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생겨나는 생산이어서 이성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간은 데카르트의 합리적 절대자아에 반기를 들고 프로이트를 귀환시켜 주체를 해체한다. 주체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되어 있고 그 차이 때문에 이성에는 환상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리오타르 역시 숭엄(the Sublime)이라는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합리주의의 도그마를 해체한다. 따라서 철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의 도그마에 대한 반기였다.
문화예술의 경우는 시기구분이 좀더 세분화된다. 19세기 사실주의(Realism)에 대한 반발이 20세기 전반 모더니즘(Modernism)이었고 다시 이에 대한 반발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사실주의는 대상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는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믿음으로 미술에서는 원근법을 중시하고 어떻게 하면 실물처럼 그릴까 고심했다. 문학에서는 저자가 객관적인 실재를 그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스토리가 인물을 조정하여 원근법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런 사실주의는 20세기에 들어서 베르그송의 시간의 철학·실존주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등 객관진리, 단 하나의 재현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면서 도전 받는다. 대상은 보는 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도 미술에서는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되어 입체파 등 구상보다 추상으로 옮아가고 문학에서는 저자의 서술 대신 인물의 서술인 독백(‘의식의 흐름’이라고도 함)형식이 나온다.
모더니즘은 혁신이었으나 역설적으로 보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재현에 대한 회의로 개성 대신에 신화와 전통 등 보편성을 중시했고 피카소, 프루스트, 포크나, 조이스 등 거장을 낳았으나 난해하고 추상적인 기법으로 대중과 유리되었다. 개인의 음성을 되찾고 대중과 친근하면서 모더니즘의 거장을 거부하는 다양성의 실험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따라서 철학에서는 모던과 포스트모던 상황이 반발의 측면이 강하지만 예술에서는 연속의 측면도 함께 지닌다. 비록 이성과 보편성에 의지했지만 이미 재현에 대한 회의가 모더니즘(현대성)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미술에서는 추상 대신에 대중성을 띄고 다시 구상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팝아트처럼 같은 대상을 여러 번 찍어 ‘다르게 반복하기’를 선보이는 경우, 모나리자 등 친숙하고 고유한 원본을 패러디 하여 ‘다양한 재현들’을 선보이는 경우, 예술가의 권한을 축소한 미니 멀 아트 등, 단 하나의 절대재현을 거부한다. 문학에서는 인물의 독백이 사라지고 다시 저자가 등장하는데 더이상 19세기 사실주의와 같은 절대재현을 못 한다. 작가가 자신의 서술을 되돌아보고 의심하는 자의식적 서술(메타 픽션), 현실과 허구의 경계 와해, 인물과 독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열린 소설, 보도가 그대로 허구가 되는 뉴저널리즘, 작가의 권한을 최소화한 미니멀리즘 기법 등이 쓰인다. 영화와 연극 역시 사실주의의 패러디로서 환상적 기법, 자의식적 기법을 사용한다. 무용에서는 토슈즈를 신었던 19세기 발레에서 맨발의 자유로움과 기법을 중시한 모더니즘, 그리고 다시 운동화를 신는 포스트모던 댄스로 대중성과 개성이 중시된다. 서사(narrative), 기호학 등 비평이론의 경계와해는 공연예술에서 탈 장르로 나타난다. 포스트모던 건축은 기능주의 적이고 중앙집권적인 밋밋한 건축에서 장식과 열린 공간을 중시하고 분산적이며 옛것에 현대를 접합시킨 패러디가 유행한다.
개성·자율성·다양성·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념을 거부했기에 탈 이념이라는 이 시대 정치이론을 낳는다. 또한 후기산업사회 문화논리로 비판받기도 한다. 산업사회는 분업과 대량생산으로 수요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지던 시대이다. 이제 컴퓨터·서비스산업 등 정보화시대에 이르면 공급이 넘치고 수요는 광고와 패션에 의해 인위적으로 부추겨진다. 빗나간 소비사회는 때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실험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탈 이념, 광고와 패션에 의한 소비문화, 여성운동, 제3세계운동 등 포스트모던시대의 사회정치현상은 한국사회와도 무관하지 않다. 미술·건축·무용·연극에서는 실험과 저항이 맞물려왔고 80년대 말 동구권의 사회주의 몰락과 문민정부의 출현은 한국 문학과 예술에도 포스트모던 바람을 일게 하였다. 근대나 현대는 서유럽에 비하여 짧고 급속히 이루어졌기에 시민의식과 기술산업사회가 균형을 이룰 수 없었다. 서유럽과 한국사회를 똑같이 볼 수 없는 여러 상황에 의해 한국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영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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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구에 존재하는 하나의 시대정신(Zeitgeist), 인식소(Episteme), 또는 패러다임(Paradime)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론적 지주로 알려지고 있는 이합 핫산(Ihab Hassan)은 1987년에 발행한 '포스트 모던한 전망 속의 다원주의'라는 저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정리한다.
① 불확실성(Indeterminacy)
경제학자 갈브레드가 2차 대전 이후의 서구세계를 '불확실성의 시대'로 규정지은 것처럼 과학분야에서도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의 「불확실성의 원리」, 토마스 쿤(Thomas S. Khun)의 「패러다임」, 폴회이에르 벤드의 「과학의 다다이즘」등이 대두되면서 사회 각분야에서 상대주의적이고 불확정적인 세계관이 주류를 이루었다.
"과학은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 사업이자 무정부주의는 법과 질서의 대안보다 훨씬 인도적이며 발전을 고무시켜 준다."고 주장하고 자신을 "변화와 실험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영역에서조차도 즐거운 실험을 착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신 다다이스트"라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특정한 유파가 아니라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사조의 견해, 그리고 문학과 미술 등 예술 전반에 걸쳐 개방성, 해체, 반항, 변용, 다원성, 이단의 정신 등의 불확정적인 이론들을 전부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② 단편화(Fragmentation)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적, 인식론적 종합을 거부하고 총체성을 오명으로 여긴다.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논하는 유명한 글의 결론 부분에서 "총체성에 선전 포고를 하자. 제시할 수 없는 것에 증인이 되자, 차이를 활성화하여 차이의 명예를 구해내자"고 주장한다.
확신, 차이, 변증의 시대가 되며 몽따지 수법, 꼴라쥬 등의 기법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은유와 환유가 중요시되고 역설, 배리, 병렬결합이 자주 등장하는 정신분석적 시대가 도래한다.
③ 탈 경전화(Decanonization)
리오타르는 현대사회를 지배담론(Masternarrative)의 탈 권위와 붕괴의 시대라고 지적하며 그 대신 소수의 담화이며 언어게임의 이질성을 보존하는 소설화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 체계인 진리, 주체, 초월적 이성 등을 거부하고 규범과 경전에 대한 도전은 엘리트주의, 남성우선주의를 부인할 뿐 아니라 대중의 참여와 비평을 유도하며, 대중문화, 여성문화, 민중미술, 제3세계의 예술, 소수민족 예술, 노동자 예술, 이방인의 문화에 대한 관심 등의 대중 예술이 주류를 이루게 한다.
④ 재현 불가능성(Unrepresentability)
장르가 붕괴되고 혼합되는 양상을 보일 뿐만 아니라 많은 작가들이 모방을 거부하고 예술의 한계를 추구하며 소모를 즐기고 침묵 속에 존재하면서 예술고유의 재현(Representation)양식을 문제시하여 반리얼리즘의 성격을 가른다. 리오타르는 동시의 상황은 재현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거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변증법적인 종합적 분석대신 구대 불가사이를 인정한 칸트의 '숭고미(Sublime)'의 개념을 증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현대 기술 문화의 무형태성, 공해, 절대 등의 본질은 본질적으로 재현할 수 없는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며 좋은 형식들이 주는 위안을 거부하고 새로운 재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⑤ 혼성모방(Hybridization)
풍자적, 조롱적 모방, 우스운 모방을 포함하는 것으로 장르의식의 붕괴와 혼합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것은 다원적이고 확산적이며 논리를 무시하는 유동적인 현상황에 맞추기 위한 전략으로 문학에서는 '뉴 리얼리즘', '논픽션 소설'등으로 나타나서 허구와 사실이 두드러지게 배합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전통에 대한 다른 개념을 보완하다. 지속과 단절, 고급 문화와 저급문화가 혼합되고 현재 속에서 과거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확장시키게 된다. 다원적인 현재 속에서 모든 형식들은 현재와 현재가 아닌 것, 같은 것과 다른 것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작용하여 현재와 과거의 동시성을 획득할 뿐만 아니라 공간 상호성 즉 병렬적, 수평적, 평등적 공간의 확산을 통한 공동체 의식도 얻게 된다.
⑥ 대중주의(Populism)
고급문화와 본격 모더니즘에 대한 적대감이 역력히 드러나며 대중문화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 마르쉘 뒤상의 기성풍 이론은 예술의 기존 관념을 깬 것으로 '이미 만들어진' 즉 주변의 흔한 대상물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창조하였고 앤디워홀은 스프깡통, 브릴로 상자, 슈퍼맨 만화 등 대중적인 사물을 이용하여 혼합 모방기법을 연출하였다. 또한 화가인 라우센버그에게서 재미있는 것은 도시의 상업적인 추함에 영원성과 자연의 불변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그는 도시 일상의 재료들을 즐겁게, 그리고 전적으로 수용한다. 그에게는 도시의 추한 면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방식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의식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⑦ 행위(Performance)와 참여(Participation)
포스트모더니즘은 직접 행위와 대중의 참여를 유도하며 행위로 연출되기를 기대한다. 예술은 행위를 통하여 시간, 공간, 또는 사람들에 의해 변화되고 완성된다.
요즈음은 예술의 여러 가지 경향을 관통하는 인식들은 '놀이'라는 개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많은 예술가들이 엄격한 통제와 인간관계의 틀을 버리고 우연의 작용을 신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술에서도 구도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이 되었고 존재하고 의미하기보다는 작용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⑧ 보편내재성(Immensity)
앞서 지적한 불확실성의 분산은 거대한 확산을 이룬다. 보편 재재성의 경향은 율동, 상호작용, 의사소통, 상호의존, 상호침투 등의 잡다한 개념들에 의해 드러나는데 이러한 개념들 속에서 가치관의 세계화, 보편화 경향을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은 이미 아놀드 토인비의 영혼화, 어비 다드로즈의 개념화, 빅 인스트홀러의 무상화, 칼 마르크스의 역사화 한 자연 등의 개념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와 같이 상징을 통해 인간의 정신자체를 일반화하려는 정신적인 능력이 점점 커지고 있고 인간은 새로운 통신수단과 전자매체들 그리고 새로운 기술을 통해 의식과 정신의 끊임없는 확장을 경험한다.
최초에 발행된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에서 마이클 뉴만(Michael∼Newman)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창조방법을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로 분류한다.
트랜스아방가르드, 저자의 죽음, 알레고리, 도취와 불가사의, 모조, 패러디, 브리콜라주(Bricolage)등 또한 어떤 학자들은 패러디(린다 허치언), 모조 (보드리야르), 차용 (레오 스타인보그), 그리고 혼성모방 (프레드릭 제임슨)등을 주요 창조방법이나 특성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창조전략을 정리하면 재현, 패러디, 이중 코드, 전도된 아방가르드 등으로 구분된다고 볼 수 있다.
① 재현(representation)
포스트 모던 세계에서는 삶이 재현에 의해 완전히 매개되어 있다. 근.현대를 지나면서 세계는 인공위성, 컴퓨터 출현으로 벤야민이 말한 '기계적 복제의 시대' 를 훨씬 앞지를 만큼 고도로 발전되어 왔다. 이에 대해 현대문화가 내재적으로 재현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정도로 재현의 위기상태에 놓여 있다는 논의가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데리다의 재현으로부터의 '도피 불가능성'과 푸코의 인식론 속에 밀착되어 있는 전통적 재현에 관한 비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재현은 불가피하다고 보여진다.
포스트모던의 재현은 리얼리즘처럼 소박하고 낙관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리얼리티는 어떻게 의미될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문제시한다. 즉 그것은 리얼리즘을 말소시키거나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의식적으로 재현의 존재의미를 일깨우는 것, 다시 말해 리얼리즘을 분해하여 재창조하는 것이지 리얼리즘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전략들은 매체를 투명명료성과 언어와 세계간의 혹은 기호와 관련 물과의 자연적이고 직접적 결합을 추구하는 리얼리즘적 재현을 비판하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삼는다. 물론 이 같은 전략은 모더니즘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경우, 매체의 능력과 의미체계의 자기충족성을 더욱 강조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지시대상에 치명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목적하는 바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양자의 힘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리얼리즘의 투명성과 모더니즘의 반성적 반응을 비본성화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재현의 불협화음적 책략이 된다.
이처럼 리얼리즘의 현실반영, 모더니즘의 자율성을 문제시하고 '비교조화(dedoxifing)'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재현은 예술과 세계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한다. 터부시 되어오던 전략들을 소환하면서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재현의 패러디와 재차용(reaappropriation)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재현의 역사 자체를 예술의 담론과 세계의 담론 사이에 놓인 경계선이 포스트모던 이론과 실천 속에서는 상호 침범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② 패더디(parody)
패러디(때로는 아이러닉한 인용, 혼성, 모방, 차용 또는 상호 텍스트성)는 포스트모던의 지지자나 반대자를 가릴 것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체로 간주되어 왔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들은 패러디에 관심을 기울여 재현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한 방식으로 과거의 이미지들을 발굴해 내는 행위에 주력해왔다. 솔로몬 거더우(Solomon Godeau)의 표현처럼, 뒤샹의 모더니즘적 'ready-made' 는 이제 포스트모던의 'already-made'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 예술을 패러디화하는 것은 '향수'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현재의 표상들이 과거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지속성과 차이를 함께 지닌 이념적인 결과로서 유래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패러디는 또한 예술적 독창성과 유일무이성 그리고 자본주의의 소유권, 재산권에 관한 개념들 같은 인본주의적 관점을 검증한다. 패러디(어떤 복제의 형식과 더불어)에 의해 희소성이 있고 유일하며, (상업적으로)가치 있는 진품성은 여지없이 의문시된다. 이것은 예술이 이제 그 자체의 의미나 가치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패러디 작품은 '재현의 정치학' 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이 포스트모던 패러디에서 공인된 관점은 아니다. 지배적인 해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과거 형식들을 자유롭고, 장식적이며, 반역사적인 방식으로 인용할 수 있게 만들뿐만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각종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현사회의 가장 적절한 문화적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패러디를 '재현의 정치학'이라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핼 포스터(Hal Foster)에 따르면, 혼성모방 (pastiche) 은 신보수주의적 포스트모던의 '전형적 기호'가 되어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맥락과 연속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상호 모순적인 '예술작품과 생산양식'을 허황되게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린다허치언은 포스트모던 패러디는 그것이 인용하는 과거 재현물의 맥락을 부정하지 않으며, 우리가 오늘날 불가피하게 과거와 유리되어 있음을 환기시키기 위해 아이러니를 사용할 뿐이라고 반박한다. 현재는 과거의 지속이며 다만 거기에는 역사가 빚어낸 아이러닉한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던 패러디에는 모순적 형식들을 일거에 해결하지 못하지만, 그러한 모순을 밝히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모순은 재현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일깨워주는 작품 속에서 발견된다. 다시 말해 허치언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반대하는 리얼리즘 관습에 의존하여 재현의 복합성과 그 밑에 깔린 정치성을 나타내는 것을 포스트모던 패러디라 말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재현의 정치학'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③ 이중 코드(plural coding)
이중 코드는 주로 건축분야에서 사용되는 전략적 특성이긴 하지만 그 일반적인 원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보다 구체적으로 부각시키므로 그것이 어떠한 전략인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포스트모던 건축에서는 다원적인 상징적 차원들을 재 도입하고 부호체계를 혼합시키며, 지방 특유의 언어들과 지역 전통을 도용하는 행위들을 선호하게 되었다.
젠크스(Charles Jencks)는 건축가들에게 두 방향, 즉 '서서히 변화하는 전통적인 부호체계와 한 이웃이 갖고 있는 특수한 민족적 의미라는 방향 하나와 빠르게 변화하는 건축상의 유행과 전문주의의 부호체계라는 또 다른 방향을 향하여' 동시에 바라볼 것을 제시한다. 즉 젠크스는 민족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 의미와 유행,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의 괴리를 좁힐 수 있는 예술의 방식을 모색했던 것이다.
포스트모던 건축에서 가장 뚜렷하고 빈번하게 나타나는 이러한 다원주의 형식은 과거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모더니즘 예술이 고전적인 것을 추방하면서 과거와의 단절을 꾀하는 데 고무되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은 역사적 스타일과 기법을 복원하고 재창조하는 새로운 의지를 보여준다. 젠크스의 말을 빌리면, 이것은 건축언어의 상대성에서 진일보한 결과라고 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서 주목을 끌어왔던 다양한 형식의 부활주의 속에서, 우리는 건축의 동시적 맥락뿐만 아니라 일시적이며 동시적 맥락을 충족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젠크스는 현대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 기능적인 것과 장식적인 것, 가시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의 조화를 기대하면서 그가 말한 '진보적 절충주의'의 시대를 보다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진보적 절충주의'속에는 "다른 종류의 의미들이 정신과 육체 같은 상반된 기능을 추구하면서 상호 관계하고 상호 교호할 수 있도록"하는 다가치성이 내포된다고 설명하였다.
이중코드는 맥락에의 관심과 역사에의 관심을 의미심장하게 엇물리게 한다. 젠크스의 이중코드가 역사적 이원성을 일원화시킨다면, 케네스 프램턴 (Kenneth Frampton)은 맥락의 이원성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케내스 프램턴은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ism)'라는 글 속에서 문화적 차이가 국제적인 건축문법의 획일성으로 사라지는 경향을 저지하는 건축을 구상한다. 프램턴에 따르면 '비판적 지역주의'란 모던 건축 빌딩 형식에 반대하거나 그 속에서 지역적 특수성을 발전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하여 프램턴은 이런 지역주의 형식을 산업 사회 이전의 모델이나 빌딩 설계 방법으로 회귀시키는 단순한 과거에의 동경 행위와 조심스럽게 구별짓는다. 그에 따르면 이 지역주의는 '비판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을 새롭게 결합시키는데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특수한 지역성의 언어는 모더니즘 속에서 일찌기 발견된 것이라 할지라도 지역 전통은 물론이고 지역의 풍토나 지질에 관한 문제를 감안한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의 이중 코드를 나타냄으로써 생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젠크스와 마찬가지로 프램턴은 현대예술의 추상을 전통적으로 서구 합리성 인식론적 규율과 결합되었던 시각의미의 야만적 지배를 가져다준 결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그는 '읽히는' 빌딩을 확산시키고, 빛과 어둠, 뜨거움과 차가움의 세기를 조절하는 등 의미의 범위를 넓히는 '저항의 건축'을 강조했던 것이다.
④ 전도된 아방가르드
모더니즘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아방가르드에 대한 포스트 모던적 태도는 상반되게 나타난다. 하나는 철저하게 아방가르드를 거부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아방가르드의 전략과 이상을 실질적으로 재포착하고 고도화시키려는 입장이다.
본래 아방가르드의 개념은 모더니즘의 핵심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에 관한 많은 설명들은 아방가르드의 초점의 범위를 미리 앞질러 가버렸다.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미적 형식에서 이념적 물질적 계기를 발전시켰고 미술에 있어 창조를 "제조"로 작가를 "생산자"로 대체하는 개념과 기능의 적극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아방가르는 점차로 미학과 정치적 영역의 분리, 즉 초기의 아방가르드의 정치적인 도전들이 예술가 개인의 형식적 실험의 제한된 탐구로 떨어져 분리의 입장으로 후퇴했다. 이 같은 정치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의 의도된 분리의 정당화는 키치, 대중문화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양식으로 전개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양상을 비판하며 아방가르드가 경멸해온 대중문화에 대해 귀족적으로 거리를 유지해온 태도를 가차없이 버린다. 이것은 귀치와 대중문화의 수용을 의미한다.
앤디워홀과 로이 리히텐스타인 같은 팝작품이 그 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방가르드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전략적으로 수용된다. 19세기 후반구의 예술적, 사회적 편견에 대해 구체적 방식으로 대응하려는 태도가 문화적으로 점차 보편화되면서 아방가르드의 의미는 혁신적 의도를 지닌 예술 조류를 지칭하는 의미가 점차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레나토 포지올리(Renato Poggiloi)는「아방가르드의 이론」이란 저서에서 아방가르드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첫째, 적극적 행동주의(Activism) - 행동, 다이너미즘, 전진, 탐험정신
둘째, 대립의식(Antagonism) - 역사적 사회적 기본질서에 대한 대립의식, 반전통주의
셋째, 허무주의(Nihilism) - 파괴성, 유치함, 극단적 행동
넷째, 불안(Agonism) - 낭만적 불안, 긴장, 희생, 정신적 패배주의
다섯째, 미래주의(Futurism) - 미래의 예술에 대한 예견이나 예고
위의 특성들 중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보여지는 몇 가지의 특성들과 공통적으로 보인다. 특히 대립의식은 모더니즘에 저항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상당부분 공통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아방가드로와 숭고미의 결합을 요구한 리오타르 역시 모더니즘 에너지의 개개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종국의 모더니즘이 아니라 발생기의 상태에 있는 모더니즘이며 이러한 상태는 지속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세잔 피카소, 칸딘스키, 클레, 몬드리안, 말게비치, 뒤샹과 같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에 의해 고양론 모더니즘의 원리에 대해 탐구하면서 "아방가르드의 실제적 진행은 모더니티의 가정들을 파고드는 탐색의 길고, 완고하고, 고도로 책임 있는 노동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다원화되고 있고 대중문화는 그러한 사회에서 커다란 위력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는 대중문화를 인위적인 입장에서 거부하는 식의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때이다. 대중 매체에 의해 문화가 형성되고 소멸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아방가르드의 본래적 의미를 퇴색하게 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리얼리즘과 재현성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는 점에서 또한 모더니즘과 매우 유사한 입장을 갖는다. 리얼리즘의 여러 특징 가운데서도 특히 모방이론에 근거하는 재현성은 모더니즘을 리얼리즘과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이다. 낭만주의 전통에 입각한 작품을 가리켜 '아름다운 거짓말'로 간주하던 리얼리즘의 작가들은 객관적으로 모방하거나 반영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예술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재현성에 대한 회의는 모더니즘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한결 더 첨예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리얼리스트들과는 달리 자연이나 우주 또는 삶의 실재에 대하여 그렇게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지 않다.
실제 세계보다는 오히려 창조된 세계를 더 중시하는 그들은 실제가 예술적 창조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포스트 모더니즘이 보여주는 반리얼리즘적 입장과 비재현성에 대한 강조는 무엇 보다도 자기 반영성,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메타 픽션에서 잘 나타난다. 흔히 포스트 모더니스트 들로 범주화되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러한 자기 반영적 메타픽션을 매우 중요한 쟝르로 간주한다. 그러나 자기 반영적 실험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칭찬보다는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다. 로버트 올터는 [부분적인 마술]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극도의 실험성을 가리켜 '자유'가 아니라 '방종'에 해당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스트들이라는 거인에서 태어난 난쟁이 후예들로서 삶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자신의 예술을 통한 일종의 예술적 자위 행위의 희열에 탐닉해 있다"고 주장한다.
기성 전통과 인습에 대한 심각한 도전과 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은 권위나 중심에 대한 갈망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것은 20세기 현대에 만연되어 있는 혼돈과 무질서를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권위나 중심에 의존 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더니즘은 형식이나 기교면에서는 매우 급진적이고 때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내용이나 주제면에서는 여전히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중적이고 양면적인 성격이다.
모더니즘의 경우 문학을 비롯한 예술 장르는 마치 군대의 계급이나 천사의 계급 조직처럼 서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러 이러한 장르에 놓여 있던 높은 장벽이 무너지고 각각의 장르가 서로 혼합되고 결합되기 시작 하였다. 레슬리 피들러가 말하는 이른바 '경계선을 넘고 간격을 좁히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탈장르화' 또는 '장르확산'으로 잘 알려진 현상이다.
고급 예술이 지향하는 진지성과 엘리트주의적인 특성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동안 구체적인 일상적 삶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던 예술을 삶 속에 끌어들이고자 한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들은 '예술을 삶 속에 통합시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심미적 목표로 삼았다. 특히 맨 선두에 서서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는 일종의 예술적 게릴라에 해당되는 임무를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아방가르드의 특성과 같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네오 아방가르드 '라고 부르기도 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논리적 계승이며 발전인 동시에 그것에 대한 비판적 반작용이며 단절이고, 야누스처럼 두 개의 상이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21세기를 눈앞에 둔 '문지방에 선'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19세기를 마감하는 분수령에서 매슈 아놀드가 느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한 세계는 이미 사멸되고 다른 세계는 아직 새로이 태어나기에는 무력한 두 세계" 사이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개성·자율성·다양성·대중성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이념을 거부했기에 탈이념이라는 이 시대 정치이론을 낳는다. 또한 후기산업사회 문화논리로 비판받기도 한다. 산업사회는 분업과 대량생산으로 수요에 의해 공급이 이루어지던 시대이다. 이제 컴퓨터·서비스산업 등 정보화시대에 이르면 공급이 넘치고 수요는 광고와 패션에 의해 인위적으로 부추겨진다. 빗나간 소비사회는 때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실험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무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탈이념, 광고와 패션에 의한 소비문화, 여성운동, 제3세계운동 등 포스트모던시대의 사회정치현상은 우리사회와도 무관하지 않다.
표현주의
미술가들의 외부에 있는 자연을 표현하기보다는 내적인 느낌과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선과 형태, 색채를 사용하는 것을 지칭한다.
하나의 특정한 운동으로서 표현주의는 20C 길목에서 10년 동안 독일에서 가장 발전하였고 예술작품에서의 '내적 필연성'과 공감대를 강조하는 철학적 기반과 더불어19C초의 독일낭만주의, 반 고호의 격렬한 자기표출, 뭉크의 상징주의와 그래픽 기법, 비슷한 시기에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야수파의 현란한 색채같은 미술사적인 선구자들을 출발점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1905년에 드레스텐에서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칼 슈미트 로틀러프 그리고 에릭 헤켈은 '다리'(橋)라는 미술공동체를 형성했고 이 집단은 보다 독립적인 에밀 놀데와 함께 대담하게 그린 풍경화, 초상화, 누드작품 전시회를 열게된다. 이밖에 간행물과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보는이들로 하여금 더욱 접근하기 쉽게 값싸고 거칠지만 힘이 있는 많은 목각제품들이 제작되기도 한다. 그 후 뮌헨에서 또다른 표현주의파의 그룹이 '청기사'라는 이름으로 결성되었다.
1911년에 첫 전시회를 가진 이 집단에는 바실리 칸딘스키, 프란츠 마르크스, 폴 클레, 많은 미술가들이 참가하고 있었고 이들 가운데에는 여러 다른 표현 방식으로 작업하면서 1950년대까지 표현주의 방식으로 작업을 계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40년대에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의 발전에 있었서는 내적 감정의 강조가 근본적인 단서가 되었다.
1970년대 말에 신표현주의파라고 불리운 독일 화가들은 구상적 표현주의로 되돌아갔고 이 화가들은 실물 보다 큰 추상주의의 규모를 유지하면서 주제와 기술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보다 강력한 힘을 표현했다.
형식주의
평론적인 이 태도는 미술 작품의 구조와 그 형식적 수단이 어떤 非본질적인 내용보다도 앞선다는 것을 강조. 모더니즘의 역사에서 형식주의는 입체주의, 절대주의, 기하학적 추상, 그리고 여러 추상표현주의에서 더욱 순수해졌으며 미니멀미술에서 그 결론에 도달했다.
다른 한편 형식주의는 표현주의나 다다, 초현실주의 및 리얼리즘에서는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미니 멀리즘에 이러 강렬한 反형식주의는, 개념미술과 그 파생인 패턴 미술, 그리고 다소간의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구상적 리얼리즘에서의 공통적인 요소가 되었다. 어느 면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바로 후기 형식주의이다.
장 아르프 [수선화]
후기 인상주의 post-im-pressionis(영)
영국의 미술평론가 로져 프라이 RogerFry가 1910~11년 겨울에 런던의 그래프론 화랑에서 기획.개최한 전시회인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 이란 표제에서 유래한 명칭.그러나 특정한 예술운동,단일한 경향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모네, 피사로,시슬리 등의 인상주의와 단순한 점묘주의*로서의 신인상주의에 대한반동으로 전개된,보다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하려 했던 경향과 표현내용을 중요시 하려했던 경향을 말한다.
여기에는 만년의 르노아르,A.루소 등의 화가도 포함되나,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세잔느,반 고호, 고갱 세 명만을 가르키는 경우도 있다.3인 모두 초기에는 인상주의에 참가하여,인상주의의 기법으로 그렸었으나 세잔느는, 인상주의의 작품이 물채의 형태가 불꽃 속에 용해되어 공간표현이 애매해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물체의 실제감과 고전적 작품의 견고한 화면 구성을 구해서 입채파* 에의 길을 걸었고, 반 고호는 정열적인 감정의 표현을 강하게 하여 표현주의*의 선구가 되었다.
고갱도 상징주의*적 색채를 짙게 띤 인간 생과 사 , 영적인 것 등의 표현을 통하여 인상주의를 탈피, 그 순색의 넓은 색면에 의한 기법을 개발하여 야수파*에의 길을 개척했다.
인상주의에서 일단 발전하여 그 개성적인 표현방법을 확립하고, 다음의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이들 화가들을 일괄한다는 점에 이 '후기인상주의'란 말의 의의가 있다. 그러나 포함되는 화가의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는 것과 내용이 애매한점 등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시미술(原始美術) 1
1. 이미지의 탄생
미술이란 무엇인가? : "이런 것이 <미술>이다." 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술이라는 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뜻을 의미하고 미술이란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때 모든 활동을 미술이라 할 수 있다.
미술의 탄생 : 미술의 탄생을 알기위해선 원천이 되는 것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인류 최초의 작품을 수소문하여 그 탄생을 알아보아야 함. 그 가장 오래된 흔적은 <손바닥 각인>이다. 외부에 투영된 신체의 흔적. 즉 이미지라는 사실이 미술의 기원에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이것은 자신의 흔적을 외부에 남겨 놓으려는 본능적인 충동이 예
탄생의 가장 원초적인 계기의 하나가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손바닥을 각인 하면서 생기는 이미지로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며 이 이미지의 출현과 함께 미술의 역사는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테두리가 지워진 형태는 그 안에 윤곽선을 내재하고 그것이 회화 예술의 첫 걸음이다.
윤곽선에 의해 형상화된 이미지 : 대상을 포착, 정복하고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는 것에 회화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야심이며 이것은 선사시대 동굴벽화도 예외가 아니며 더 나아가 서양미술의 <사실주의>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사실주의의 출발
구석기 시대 벽화(알타미라동굴, 라스코동굴 등의 후기의 벽화들) 들의 표현은 10,000여년에 걸쳐 성숙되었으며 이것은 사실주의 전개 과정 그 자체이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사실주의는 초보적인 의미에서 대상의 재현 혹은 모방을 의미하며 원시인 특유의 자연 또는 그 밖의 대상 접근 방식의 문제가 개재된다.
이 사실주의의 출발은 단순화된 개념적 윤곽선에 의한 대상 모사에서 비롯 -> 대상의 윤곽을 더듬는 선묘에 의존하나 외관 표현에 직접적인 관찰에 의한 세부 묘사가 추가. -> 원근에 대한 공간의식 발생. -> 대상 묘사의 정확도가 더해지고 윤곽선 위주의 대상파악에서 형태의 모델링이 등장하고 색채가 추가됨.
<= 선사시대 사실주의 전개 과정이기도 하며 서양미술의 사실주의가 걸어 온 길고도 다양한 도정이라고도 할 수있다. 또한 어린이가 대상을 모사하는 단계와 비교할수 있다.
문명사회의 사고는 개념적인 위계속에 압축되어 전승되나 미개사회는 문명사회와는 달리 사고가 복합적이고 방대한 집단적 표상으로 이루어지며 거의가 기억에 의해서 전승되므로 동굴벽화의 짐승들의 형상을 일종의 <기억-이미지>의 자동적 투영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눈앞에 없는 동물을 기억에 의존해서 특징적인 자태를 형상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립된 단독의 형상으로 그려지고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라든지 그것을 묶는 구도에 의한 의식은 배제되고 있다. (구도, 공간의식은 신석기 시대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모방충동에 의한 유사성을 깨닫는 것을 전제로 한다.
유사성
유사성이 나타나는 시기는 구석기 3기(오리냐크기, 솔뤼트레기, 마들렌느기)에 걸쳐 동굴벽화에 나타나며 그 계기는 <우연>으로 생각된다. 질퍽한 동굴 내벽에 우연히 그어진 선의 자욱이 생기고 그 선의 얽힘을 통해 <희한한 순간>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미술이 싹트는 순간이고 어떤 형상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 최초로 인지한 형상의 동일성을 더 강조하며 실물에 가까운 대용물을 만들어내며 어느 순간 자연에 의해 주어진 암시에서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노력 끝에 회화예술이 창조된 것이다.
유사성은 이미지의 세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조각 작품은 유사성에 있어서 회화를 앞지른다. 왜냐하면 자연이 현실에서 그대로 유사성을 인지할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줄뿐만 아니라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세계로 옮겨놓는 작업이 개재되지 않기 때문이다.
* 대상의 형태를 암시하는 자연을 실물에 닮게 모방한 인위적 형태의 전개 과정은 원시인이나 미개인뿐만 아니라 현대인을 포함해서 모든 인간이 공유하고 있다.
EX) 구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머리가 없는 점토의 곰조각(밑에 곰의 두개골의 잔 해가 있음.)
= 입체파 화가들이 실물 대신 오브제를 삽입한 행위, 피카소의 자전거 핸들 과 안장을 조립해 만든 <소의 두상>.
이것을 볼 때 유사성은 선사시대인 이나 현대인이나 본질적인 차이는 없고 단지 선사시대인은 자연에서 현대인은 기성품(문명)에서 출발했다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현실과 허구 , 대상(사물)과 이미지와의 영원한 이율배반적인 관계는 미술의 영원한 라이트모티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은 이미지의 보고이며 상상력의 시발점이며 자연의 혼돈적인 형상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새로운 창의를 이끌어 낸다.
원시미술(原始美術) 2
1. 원시 미술과 정신분석
(1)평원 인디언의 가면
잠재의식의 신비에 대한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열쇠는 꿈이다. 시대와 문화 단계에 따라 꿈에 대한 태도도 달랐지만 프로이트의 꿈에 대한 학설 발표이래 현대의 정신 분석적인 추 구는 합리적이 되었다.
꿈에서 본 것을 현실에 있는 그대로의 현상과 동일시할 수 있게 되기 전에 그 속에서 상 징적인 의미를 발견하다해도 꿈은 본질적으로 우리들 자신의 개성과 경험의 반영이다. 여 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원시인의 해몽 방법이다.
상징주의가 원시 미술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꿈의 원시적인 해석은 상징적인 것은 아니다. 원시인은 현실적인 사실과 상상적인 사실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것은 꿈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입회식때 젊은이가 느끼는 환영과 환각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이를테면 북미의 여러 부족 사이에서는 수호 정령을 원하는 젊은이는 그것을만나기 위해 숲속에서 단식 등을 하며 한 가지에 전념한다.
그러다 보면 그들의 감각은 흥분되어 여러 가지 환영나 환각을 상상하게 된다. 평원 인디언 사이에선 이러한 불가사의한 경험이 어떤 종류의 미술에도 반영되진 않았지만 북서 해안에서는 이러한 불가사의한 경험이 표현적 조각을 자 극하여 고도로 발달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신화 속에서의 생물이 가면이나 벽화에 묘사되 어 독특한 전설, 노래, 춤과 연결되기도 한다. 일단 가면이 정령이나 그 밖의 초자연적인 것 을 경험한 사람에 의해 처음으로 조각되어 종교적인 의식으로 받아들여지면 그것은 비밀 사 회의 계급조직속에서 받아들여져 동절기 의식이 진행되는 기간에 정기적으로 나타나게 된 다. 가면을 쓴 무용수는 배우가 아니라 정령 그 자체의 화신으로 간주된다. 원시인의 마음 상태에 서보면 신화의 세계는 현실이다.
(2)원시 미술의 성(性)표현
C.P.마운트포드씨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소년 한 명을 관찰하였다. 그 소년은 자기의 주변에 보이는 모든 사물을 종이 위에 그렸다.(유럽의 도구, 자동차, 비행기등) 그것은 유럽 의 어린이가 그린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으나 그 소년은 후에 <덤불 숲으로 가서> 그의 부 족 풍습에 따라 입회하였다. 그후 그 입회 의식 경험은 소년에게 커다란 심리적 변화를 이 루게 하여 유럽인이나 사물이 아닌 원주민의 부족 생활에 연관되는 것을 즉, 종교의식적인 것과 그것을 모방한 작품을 계속적으로 표현하였다.
대부분 원시민족간에 연령 계급과 비밀 사회의 입회식은 생물학적인 사실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본능의 분출구를 준비하지만, 이 본능은 문명적인 공동체 속에서는 도덕률과 연결 된 억압에 의해 짓눌리고 전통, 풍습, 법률, 교육에 의해 규제되고 있다. 원시민족의 성생활 은 여러 문명국가보다도 훨씬 밀접하게 공동체의 사회생활과 결부되어 있다. 대개 원시인은 신체 어느 부분도 추잡하거나 음란하게 보지 않는다. 생식기는 성의 자연적인 상징으로 생 각하며 조각과 선화 속에서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추잡하고 음란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원 시인들에게있어서 생식기는 단지 성인의 자연적인 상징이며 따라서 빼놓을수 없는 것이었 다.(남아메리카의 인디오 부족은 유럽 방문객을 그리면서 거칠고 상징적인 형태로 생식기를 표시하였다.)
더욱 발달된 문명, 즉 중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솔직함, 순수함)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 상대에 이용했던 중국 문자는 지금도 어느 정도 그림 문자이기는 하지만 남성과 여성을 나 타내는 상징을 갖고 있다. 남성은 수평과 수직 두 개의 막대로 여성은 각진 짧은 막대기의 구부러진 수직선으로 이루어져 비교적 단순하다.
<자연적인 것은 추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는 원시인의 태도의 특색을 설명하기에는 충 분치 않다. 왜냐하면 원시인에게 자연적인 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기에 특별히 강조할 필 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적인 존재를 표현할 때는 신체의 어느 기관이나 기능이 상 징적인 의미를 지닐지도 모르며 이 상징주의는 때때로 명확해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농경 부족의 가면 무도회에서 생식기는 비옥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는 출산의 조형 적인 표현은 콩고강 유역에서 가면을 쓰는 것으로 발견되었다.
성적인 것으로 더욱 수수께 끼 같은 상징주의는 뉴기니의 세피크와 람 지역 북부의 중앙뉴아일랜드 조형 미술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곳이 여러 가지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남녀 추니(남녀 양성을 겸하여 가지는 것) 상이 발견된 곳이다. 그것은 우주의 창조력이며 남성 및 여성 원리의 우주 창조적 상징으로 해석되고 있다. <반음양적 존재>의 신화적 의미에 관하여 J. 윈시스는 매혹적이기는 하지만 견해가 다양한 저서를 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원시 미술의 상징적 작품을 바르게 분석하 려면 한 가지 조각과 선도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고, 그림이 포함되어 있는 신화라든가 전설 연구가 필요하다.
2. 미술 작품과 원시사회
(1)장식미술과 조각
미술가의 창작 작품은 그것이 주변 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받았든 그 창조 행위는 완전히 개인적인 부분이다. 하지만 창작이 된 후에는 이것을 이용하는 것은 대중사회다. 이처럼 원시 미술의 생산은 공동체의 사회생활(종교의식, 전쟁, 정치, 작업, 스포츠 등)을 위하여 설계되었다.
북미 평원 인디언 사이에선 남성은 조각과 묘사화를 담당했고 여성은 장식미술 즉 문양 같은 것을 독점하였다. 왜냐하면 여성은 베짜기라든가 도자기 만들기 등의 공예품을 만들 었다. 따라서 여성들은 당연히 공예에 수반되는 전통적인 문양을 그리게 되었다.
조각은 원시사회에서도 상당 부분 개인적인 활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개인적인 미술가 들은 그 재능과 높은 명성 때문에 부족의 한계를 초월하여 북서안, 특히 퀸 샤롯트 제도 의 하이더족 사이에는 개인적인 미술가들의 기록이 있다. 북서안은 토착 문화가 유럽 문 화에 의해 붕괴되기까지 민족 전체의 미술가들의 탄생지였던 듯하다.
나무외 그 외의 재 료로 재능을 나타낸 조각가들은 하이더족 외에 인근 틀링키트, 쯔임시안, 쿠와키우토르에 서도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또한 많은 미술가가 단 하나의 작품, 즉 토템 폴제작에 공동 으로 참여하는 흥미 있는 일례를 남기고 있다. 토템 폴이 세워졌을 때는 커다란 서양 삼 나무 줄기가 형상의 수만큼 구획이 나뉘어졌고 각 형상의 마무리는 각기 다른 미술가에게 분배되었다. 성과 연령이 다른 집단에 일을 분배하는 것은 대개의 원시 공동체에서 불 수 있는 현상이다. 더욱 진보된 단계에서는 다양하게 구별된 직업이나 사회 계급이 발달하였 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원시 부족에서는 고도의 문명화된 공동체 시민 사이에서보다도 동 질성이 한층 더 강하다. 종교상의 차이점은 조금도 없었으며 부족의 성인 구성원은 모두 같은 의식에 참석한다. 농경, 어렵, 수렵 따위의 작업은 공동으로 이루어진다. 통상적으로 토지는 공유물이었고 농경, 목축, 수렵에 대한 권리는 공공의 것이었다. 누구나 공동생활 의 관례에 익숙해 있으며 부족에서 무엇이 행해지고 있는가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2)미술 작품과 원시법
I. 미술 작품과 공동체 의식의 관계
사람을 놀라게 하는 대부분의 가면이 만들어진 곳은 비밀 사회였다. 이는 비밀 사회의 밀의를 지켜야 했기 때문에 미입회자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설치되었다. 그것이 원시 미 술의 통속적인 편견(괴기함, 꺼림직함)을 낳는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
원시사회는 협동적인 성격이 매우 강했다. 춤과 노래의 일부분은 동물의 동작과 목소리 를 흉내낸 것이다. 이것은 마법으로 사냥감을 잡는다던가 또는 두려운 동물을 먹이로 잡 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공동체 모두와 관계가 있고 마술 무용 또한 개별적인 집단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각각의 토템 씨족에게 있던 특유의 모방무용또한 협동 표현 의 한 예이나 무용자 전원에 의한 것이든 개개인에 의해 행해진 것이든 모임의 성격은 공 동체 전부와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어떤 모임의 활동이든 정리를 원칙으로 하는 리듬이 필요했다. 그 리듬은 원시 행사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이것은 나무 용기나 도기 의 윤곽, 도기나 직물의 장식, 표현적인 조각 형태에 율동적이고 재미있는 배치가 나타난 다.
II. 원시 미술의 경제적인 면
원시 미술은 또한 경제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미술 작품은 교역품이었고 제작자와 소비 자 사이의 관계를 형성시킬수 있었다. 미술이나 공예는 물물교환을 통해 필요한것(일용품, 모피, 조개껍질 같은 원시 화폐 등)을 얻을 수 있었다. 또 미술 작품은 대량생산과 배포에 따른 공업 형태도 보였고 고고학 조사 결과에 의해 지중해에서 멀리 스웨덴까지 통상이 폭넓게 행해졌음이 밝혀졌다.
III. 원시 미술 작품과 원시법의 관계
미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인 행위는 제작자와 작품간에 친밀한 유대 관계가 성립 되며 타인이 손댈 수 없는 권리를 수반한다. 어떤 원시 민족은 미술가 자신의 창조적인 숙련의 산물을 보고 미술가의 권리를 높이 평가했고 작품이 종교적인 성격을 가질 때 더 욱 그러했다. 예를 들자면 타미섬(뉴기니의 북연안)에서 만들어진 배모양의 나무 사발은 밑에 제작자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 북서 아메리카 인디언 사이에서는 다양한 씨족이 문장, 전설, 노래에 따라 구별되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재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것은 조상으로부터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씨족이나 가족의 연장자가 생애 소유권을 물려 받는다. 문장(文章) 소유권은 그것을 이용할 권리 또는 새로운 가면에 조각할 권리를 말한 다. 전설이나 무용에 대한 재산도 그것에 상응하는 독점적인 것이다. 소유자 이외에 어느 누구도 춤을 추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재산은 팔거나 양도할 수는 있다.
이러한 원시적인 제도와 그들의 문명화된 유사한 물건 사이에는 역사적인 관련성을 유추 할 수 있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인간사회는 유형 무형의 미술 작품을 법적으로 지킬 필요를 본디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심리적인 근원은 사람과 작품 사이의 마술적인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앙이지만 이와 같은 신앙이 풍습에 의해 시인되었을 때 그것은 법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3. 농민 미술과의 차이
유럽 문명이 들어오기 전 대부분의 원시 부족은 사냥꾼 혹은 농부였으며 대부분은 이러한 작업을 겸하고 있었다.
원시 부족은 생계 형태에 따라 농부에게서는 농경 신앙이 미술 작품에 반 영되었고 어부는 해양 미술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미술 작품을 발달시켰다. 농민 미술은 도시 에서 발달한 미술에 비하면 원시적이며 고대의 미개 시대부터 있었던 순수하고 원시적인 특성 을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표현 미술보다 장식 미술에 적합하다. 그러나 현대 농민 미술은 장식 미술과는 전혀 다른 요소로 성립되어 있다. 도시의 종교적인 흔적이 멀리 떨어진 촌락에서 발 견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그리스도, 동정녀 마리아, 여러 성인들의 상. 아시아에서는 불타, 보살 또는 흰두교 신들의 상을 본떠 만든다. 중앙의 교회나 사원에서 만들어진 미술 작품을 직 접 본떠 각 마을의 신전에 세웠다.
또는 원래 작품이 아닌 복제품을 본뜨기도 하였고 농민 공 예가들은 갖가지 상상력을 발휘하여 형상을 묘사하거나 조각했다. 이처럼 농민 미술은 원시적 이었지만 실제로는 파생적인 특성을 띠며 발전하였다. 따라서 농민 미술은 원시 미술과 동일시 할 수 없다. 장식적인 면에서 보아도 원시 미술에서 느낄 수 있는 활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매우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