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연 작가
민정연의 회화: ‘내면의 실재와 공간의 연속성’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민정연 展 2016. 9. 28. ~ 10. 23. 공근혜갤러리]
작가에게 중요한 건, 미적 상상력과 체험이다. 두 가지는 무척 다르지만, 서로 조합되면 놀라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 이 생각을 재확인하게 해 준 당찬 작가가 있다. 서울과 파리를 오가는 민정연이다. 그가 지난 10월, 공근혜갤러리에서 가진 《공간의 기억》전은 요즈음 보기 드문 화가로서의 손맛과 문화적 체험을 자기화한 ‘끼’있는 작가의 멋진 무대였다.
그림은 화가에게 일기와 같아서, 작가가 보고 자란 환경과 거쳐 온 공간, 그리고 타고난 개성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민정연의 그림을 읽으며 그가 지내온 세월과 공간을 생생하게 느낀다. 14년 전, 어린 미대졸업생이 처음으로 접한 파리란 도시. 그리고 이후 오랜 시간 그 공간에 살면서 자신의 도시들(서울과 광주)과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계.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들 사이의 거리는 분명, 공간의 분리나 단절을 뜻한 게 아니었을 테다. 작가에게 그건 차라리 이음새 없는 연속성이었다. 철새처럼, 그저 운명이 정해준 여정을 따라 이어온 공간의 연계를 그의 내면에서 본다.
생명체의 내장처럼 부드러운 촉감과 광물같은 지질학적 견고함이 공존하는 이미지. 그는 “종종 내장과 동굴 등 유사한 유기적, 광물적 형상들에 흥미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어렸을 때부터 광물과 식물 등 자연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작가다.1 민정연 작품의 첫 인상으로 초현실주의 회화를 떠올리는 건 무리가 없다. 누구나 새로운 이미지를 보면 일단 자신이 지닌 생각의 유사한 범주에 넣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는 일단 우리가 아는 미술사의 범주에서는 초현실주의다. 그러나 오래 접하고 나면 이전 초현실주의 그림과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 점이 민정연 그림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2
미술의 전문적 눈으로 그의 회화와 가장 근접하게 느껴지는 작가는 이브 탕기다. 탕기 그림의 차갑고 맑은 공기와 섬세하게 아름다운 색채가 특히 그렇다. 기괴한 유기체적 형태들 또한 관련이 있지만, 전체적인 언캐니한 분위기가 서로 통한다. 웬만한 내공 없이 가능하지 않은 미적 공간의 표현이다. 지극히 부드러운 색채와 고요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민정연의 그림엔 언제나 그 조화를 깨는 무언가가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보는 이를 교란시키고, 아이러니하다고 여긴다. 물론 의도적이다. 영감을 얻는 화가들로 히로니무스 보쉬나 프란시스 베이컨을 작가가 꼽는 것은 이러한 그의 미적 성향을 드러낸다.
민정연 개인전 《공간의 기억》 전시 전경, 2016.
하얀 깃털을 형상화한 레진 조각설치를 뒷편의 회화 <길>에 그려진 길과 연결되도록 연출했다.
작가는 말하기를, “나는 실제적인 것과 가상의 것 사이의 끊임없는 교차에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말만은 아닌 듯하다. 이 말은 거침없이 솔직하고, 당차게 ‘튀는’ 작가의 페르소나와 더불어, 다른 공간들의 교차를 체험하는 그의 실제 삶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거쳐 온 구체적인 도시들은 광주-서울-파리-툴롱(Toulon). 이 도시공간의 거리상의 간격과 확연한 경계가 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서 체험된 공간은 분리가 있을 리 없다. 작가의 내면적 공간은 그의 그림에 나오는 고속도로처럼 미끈히 연결돼 있고 공간 사이 간격은 빠른 속도로 이어져 있다.
광주에서 태어난 민정연은 서울에서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후 2002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국립예술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최근까지 프랑스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작가가 선택한 파리는 그와 잘 어울렸다. 최근에는 프로방스로 옮겼지만, 파리는 그의 작업을 궤도에 올려놓은 시기의 공간이다. 파리라는 도시는 공기 중에 ‘자유’라는 기포가 떠다니는 곳이다. 글로벌 문화를 동경한 한국 현대미술의 1세대 유학파들의 애정이 깃든 장소이자, 예술가라면 누구나 영감을 얻는 곳임은 말할 나위 없다. 자유로운 개성의 작가 민정연에겐 파리가 맞다. 그런데 그가 특히 주목한 파리의 매력은 ‘기억의 도시’란 점이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공존하는 공간. 현재를 사는 내게 과거가 분리될 수 없는 연속성의 공간 말이다. 사실 이 점이 파리라는 도시의 핵심이다.
민정연, <어머니의 초상 Portrait de Ma Mere>, 캔버스에 아크릴릭, 100x100cm, 2015.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현재까지 활동하는 작가는
최근 파리에서 남프랑스로 이주했다. 그 경험을 작업에 깊숙히 끌어들여,
작가는 자신의 내면과 외면의 공간이 얽히고 또 만나는 모습을 표현한다.
이음새 없는 매끈한 회화: 경계 없는 실재와 비실재
그의 회화에는 이음새가 없다. 경계가 전혀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 공간의 연속성을 표현하기란 무척 어려운 것이다. 과거를 현재에서 확인하며 그 연계를 내면의 공간에서 느낀다고 해도, 이를 그림에서 나타내기란 쉽지 않은 법. 작가가 쌓아온 내공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그의 작업이 제시하는 ‘기억의 공간’이란 주제는 바로 이것이다. 실제로는 분리돼 보이고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주체의 기억과 의식에서는 경계가 없는 연속 공간이라는 점. 작가의 지각에서 분명한 실재이자 진실된 체험. 바로 민정연 회화의 테제다.
그의 그림에는 기괴하고 이상한 형상들이 미묘한 색조로 표현돼 있다. 작가의 상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나타난다. 고도로 숙련된 극사실적 표현기법으로, 그는 자신의 상상이 손에 잡히는 실재라고 구사하는 설득력을 지닌다. 상상의 세계와 실재의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고, 여기(서울)와 저기(파리) 사이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는 그의 당돌한 자신감이 그림을 버틴다.
민정연의 ‘실재같은 비실재/비실재의 실재’는 세포같이 부드러운 유기적 형상들과 시원의 화석, 그리고 동굴같은 공간과 용암, 석순 등 기묘한 형상들이 이룬다. 여기에, 느닷없이 차갑고 날카로운 도시의 요소가 포함되곤 한다. 건축의 편린과 아스팔트도 보인다. 그림에는 전원의 따스한 햇볕과 도시의 신경증적 차가움이 같이 있다. 그렇듯 이질적이고 대립적인, 그래서 이상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역설의 공간이다.
작가는 그 공간이 “감정과 분위기”를 표현해 낸다고 말한다. 그리고 “연극적”이란 말을 했다. 생각의 연극무대에 자연의 드라마틱한 장면이 펼쳐진다. 이 기괴한 공간이 왠지 익숙하고 일상적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당연히 프로이트의 ‘언캐니’를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민정연의 회화는 여기서 더 나아가, 작가의 지각에서 체험된 실재성을 지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공간의 표상에 개입된 작가의 체험적 지각 말이다. 그가 메를로-퐁티 등 현상학자를 빌어 자신의 지각 경험을 말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민정연, <어딘가에 Somewhere>,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x97cm, 2014.
철새의 이동과 공간의 연속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보여주는 공간의 연속성은 그의 상상력에 근거하지만, 그 단초를 ‘철새’라는 모티프에 두고 있다. 그래서 그림들 곳곳에 깃털이 포함돼 있다. 철새가 상징하는 특성, 즉 한 곳에 고착되지 않는 노마드성과 자유에의 갈망, 그리고 심연의 고독이 민정연 회화의 공간적 표현과 더없이 들어맞는다. 규정되지 않은 무한의 공간과 섬세한 파스텔 톤의 색채는 정오의 멜랑콜리와 같은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정교하고 세밀한 기법은 곱디고운 색감의 표현과 더불어 새의 깃털을 고정시킨다. 상처받아 망가지기 쉽고, 한없이 외롭고 슬픈 깃털.
그런데 이 깃털의 연약함은 민정연 작업의 일면이다. 작가의 세밀한 표현기법, 밀도 있는 형상, 섬세한 색채 그리고 대담한 구성은 연약함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전체적 이미지는 차라리 놀랍도록 견고하다. 그 공간은 마치 연극무대처럼 그 영역에 작가가 표현하고픈 섬세한 감정과 심리적 분위기를 안전하게 보유한다. 더구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깃털 모티프에 존재감을 부여했다. 새의 날개를 대형 조형물로 만들어 전시한 대담성을 보인 것이다. 평면회화에만 존재하던 깃털은 3차원의 오브제로 눈앞에 견고히 현현되었다.
레진으로 깃털 하나하나를 일일이 손으로 만든 날개 조형은 엄청난 디테일과 놀라운 수공의 작업이다. 회화의 상상력은 조소의 실재성으로 변신한 셈이다. 이 설치는 민정연의 미학이 실재와 비실재 사이의 이음새를 모색하는 작업이란 생각을 확인해 준다. 동시에, 또 하나의 공간 구상이 추가된다. 작가는 이 조형물과 연계된 회화를 마주 보는 벽에 걸고, 입체와 평면의 관계를 만들었다. 즉, 두 작품 사이의 위치를 치밀하게 조정하여 입체에서 시작된 고속도로를 그림 속 고속도로로 연결시킨 것이다. 그래서 날개 조형의 적정한 위치에 선 관람자가 보기에, 입체 깃털에서 접붙여 연장된 고속도로는 실제의 전시공간을 너머 벽에 걸린 회화 속 고속도로에 놀랍도록 정확히 연결된다. 말하자면, 회화에서 발현된 상상의 공간은 3차원으로 구현되어 관람자의 공간과 개입하게 만들었다. 절로 감탄이 나오는 설치다. 천상 ‘화가’라고만 여겼던 그가 드디어 회화의 평면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거침없는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며, 민정연 회화의 몽환적 실재는 매체의 한계를 거부하며, 또 다른 공간으로 이음새 없이 연속되고 있다.
1.민정연은 어린 시절, 화석 수집전문가인 부친의 영향으로 기이한 광석과 유기체들로 둘러싸여 지냈다고 회고한다. 아버지를 따라 지프차를 타고 여러 산을 돌아다니면서 땅을 파고 화석체취를 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취미는 식물도감을 보는 것이었다고 한다. 화가가 아니었으면 식물학자가 되었을 것이라 덧붙였다.
2.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굳이 명명한다면, 일종의 ‘모던’ 초현실주의라고 이름붙였다. 그는 “만약 내 작품이 ‘전통적’ 초현실주의와 같이 보인다면, 그 배후의 생각은 차이가 난다”라고 강조했다. 초현실주의와 쉽게 연결짓는 것에 대한 작가의 거부감을 읽을 수 있다.
[출처] [아트 인 컬쳐 12월호] 민정연의 회화: ‘내면의 실재와 공간의 연속성’|작성자 socioart
작가 민 정 연 님은 1997년도 전원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린 후 홍익대학 회화과에 합격하였습니다.